뉴스 > 정치 > 정치일반 > 토요판 커버스토리

[토요판 커버스토리]박근혜의 그 열여덟해

동아일보

입력 2013-02-16 03:00:00 수정 2013-03-13 17:12:08

1979.11.21∼1997.12.10
“그 시절이 은둔과 칩거로 치부될 때 나는 쓴웃음만…”


1979년 10월 26일 밤 12시 무렵.

청와대 본관 2층, 박근혜 씨의 방문 앞 전실(前室)에는 감색 양복 한쪽 소매가 피에 젖은 김계원 비서실장이 머뭇거리며 서 있었다. 그 뒤에는 방금 전 근령 씨로 하여금 언니 근혜 씨를 깨워 달라고 한 전석영 총무비서관이 있었다. 김 실장이 머뭇거리며 박정희 대통령 서거 소식을 전했다. 충격에 빠진 근혜 씨 입에서 “전방은 괜찮습니까”라는 얘기가 나온 것은 그때였다. “비상계엄을 내렸다”고 답한 김 실장은 뒤이어 “함정에 빠졌다…”고 우물거렸다.

비서실장실은 황망한 수석비서관들로 어수선했다. 박 대통령의 시신을 어떻게 해야 할지 논의하던 수석들은 아침에 청와대로 모시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전 전 비서관은 “수석들은 바깥을 김재규가 장악했다고 여겼는지, 당장 모셔오려면 복잡한 문제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고 술회했다. “아침에 모시면 국민들이 알고 더 소동이 난다. 지금 바로 모시는 게 도리이자 정상적”이라는 말과 함께 전 비서관이 나갔다.

전 비서관은 근령 씨에게 아버지에게 입힐 검은 옷을 준비해 달라고 했다. “그 5년 전 육영수 여사가 돌아가셨을 때 흰 옷을 준비해서 병원에 갔던 기억이 났습니다. 총에 맞으셨으니 옷에 문제가 있지 않겠나 했습니다. 소접견실에 빈소를 마련하라고 부속실에 말한 것도 그때 기억을 따랐습니다.”

청와대와 인접한 종로구 소격동 국군서울지구병원 응급실.

수술대에 누워 있던 박 대통령에게 옷을 갈아입히는 일은 쉽지 않았다. 전 비서관은 그곳까지 따라온 근령 씨가 충격을 받을까 봐 밖에 나가 있어 달라고 했다. 동행했던 청와대 경호원 2명과 김병수 국군서울지구병원 원장의 힘을 빌려 겨우 옷을 갈아입힐 수 있었다. 앰뷸런스에 실려 청와대로 온 시신을 흰 보를 덮어 싸늘한 탁자 위에 뉘었다. 그 앞에 병풍이 쳐졌다. 육 여사의 시신이 누워 있던 그 공간, 바로 그곳이었다.

부속실에서 급히 마련한 제상에는 북어찜이 올라왔다. 식당에서는 “큰 영애께서 대통령이 좋아하는 음식이라고 해서 갖다 놨다”고 말했다. “그런데 나중에 큰 영애한테 물어보니 모르는 일이라고 하더군요.” 고건 전 국무총리(당시 행정수석비서관)는 그렇게 기억했다. 소식을 듣고 소접견실 빈소를 가장 먼저 찾은 청와대 밖 인사는 이용희 국토통일원 장관과 동훈 차관이었다.

27일 동이 튼 뒤 성복제(成服祭)를 올리고 나서야 청와대 비서실은 정상적으로 돌아갔다. 빈소도 소접견실에서 대접견실로 옮겼다. 수석 가운데 서열상 맨 위인 최광수 의전수석비서관이 고건 행정수석에게 국장(國葬)을 준비해 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국장과 관련한 주요 결정은 고 수석의 몫이 아니었다. “주로 JP(김종필 전 총리)가 친인척을 대표해서 했지요. 영구차를 어떤 모양으로 제작하라고 지시한 분도 JP였습니다.” JP는 흰 국화로 뒤덮은 버스 중간을 유리로 만들어 밖에서 안의 관을 볼 수 있도록 한 영구차 모양을 메모지에 그려서 고 수석에게 건넸다.

그렇게 10·26의 밤이 지나갔다. 근혜 씨의 방은 자신의 자서전 표현대로 ‘무섭도록 적막한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그날 밤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다. 처음에는 몸에 한기가 돌더니 온몸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렸다. 사람이 너무 큰 충격을 받으면 울음조차 나오지 않을 때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자서전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2007년)

1979년 봄으로 추정되는 어느 날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청와대 뜰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과 찍은 사진. 동아일보DB
▼ “다 지나간 일” 윤필용 만나 테니스 치며 화해▼

칩거(1979년 11월∼1988년 7월)-아버지의 이름으로 1


서울 중구 신당동 ‘박정희 대통령 가옥’에는 박 전 대통령이 1958년 이 집을 샀을 때 심었다는 향나무가 대문에 기대듯 담장 위로 높이 서 있다. 육영수 여사가 심은 목련은 향나무와 1m 정도 사이를 두고 있다. 나무를 좋아한 육 여사는 목련과 더불어 벽오동과 은행나무, 라일락 등 스무 그루를 심었다. 훗날 이 집을 다시 찾을 때면 박 당선인은 목련에 손을 짚고 깊이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고 한다.

1979년 11월 21일, 15년 11개월 동안 머물렀던 청와대를 나온 박 당선인은 화단에 나무가 빽빽한 이곳으로 돌아왔다. 대지 327m²(99평), 건평 129m²(39평)의 단층집은 방이 5개였지만 관리인과 가정부 방, 청와대에서 들고 온 짐을 들여놓은 방을 빼면 실제로 쓸 수 있는 방은 2개였다.

현재 신당동 가옥을 관리하고 있는 박운영 씨(73)는 “박 당선인이 가정부를 두지 않고 혼자 살림을 했다”고 기억했다. 그는 “박 당선인이 두 동생을 키운 것이나 다름없다”며 “인근 중앙시장에 장을 보러 가기도 했고, 김치찌개를 끓여 먹는 것도 봤다”고 했다. 박 씨는 1958년부터 1980년까지 이 집을 관리했던 박환영 전 청와대 관리담당 부이사관(2005년 작고)의 동생이다. 형을 따라 드나들며 집 관리를 도왔다.

박 당선인은 두문불출에 가까운 삶을 살았다고 당시 그를 만나본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언론 접촉도 1980년 초 일본 월간지 ‘분게이슌주(文藝春秋)’와 일본 TV방송 인터뷰 말고는 전두환 정권 시절 내내 하나도 없었다. 1984년 한 여성 월간지가 그를 잠깐 만난 뒤, 분게이슌주의 인터뷰 기사를 재구성해 ‘단독 인터뷰’라고 싣는 해프닝이 있었을 정도였다.

그런 삶에서 테니스는 그의 답답한 숨통을 조금은 틔워줬다. 운동을 좋아했던 박 당선인은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할 때부터 청와대에서 출입기자들과 테니스를 즐겼다. 당시의 일부 기자는 위로하는 차원에서 청와대를 나온 박 당선인을 불러 같이 식사를 하거나 테니스를 쳤다. 박 전 대통령의 대구사범 후배였던 김민하 전 중앙대 총장도 1980년 상반기에 박 당선인을 거의 매주 불러내 테니스를 쳤다. “전화를 걸어서 나오라고 해서 교수 서너 명과 장충테니스코트에서 운동을 했습니다. 박 당선인이 많이 외로웠습니다. 만나자는 사람도 별로 없었고, 박 전 대통령 밑에서 일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그분 사후에 등을 돌렸잖아요.”

이들과의 모임에서 박 당선인은 자신이 겪었던 염량세태(炎凉世態)의 단면을 가끔 털어놨다고 한다. ‘유신(維新)만이 살길’이라며 연설을 했다가 10·26 후 “그때 무슨 힘이 있어 반대할 수 있었겠느냐”고 태도를 바꿨던 고위 관료며, 어느 식당 엘리베이터에서 박 당선인을 우연히 만나자 당황해하며 못 본 척하다 다음 층에서 황급히 내렸다는 박 전 대통령 시절 장관 이야기 등이다.

특히 전두환 정권 시절 박 전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매도되고 있다고 생각한 박 당선인은 나중에 언론 인터뷰에서 “상당히, 정말 가슴 아프게 살아왔다”고 했다. 실제 전두환 정부는 국립묘지의 박 전 대통령 묘역에서 유족들이 공개 추도행사를 하지 못하게 했고, 박 당선인이 이끌던 ‘새마음봉사단’을 해체하라고 종용했다. 결국 이 단체는 해산했다.

독서도 그의 지친 마음을 달래주는 데 한몫했다. 특히 제왕학의 교과서라 불리는 ‘정관정요(貞觀政要)’를 비롯한 중국 고전이 큰 도움을 줬다고 한다. 박 당선인 측 인사는 “청와대에서 나와 힘들 때, 무엇을 해도 어떤 책을 읽어도 어지럽던 마음이 중국 고서를 읽고 나니 비로소 안정됐다고 박 당선인이 여러 번 이야기했다”고 전했다. 정관정요는 사실상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당 태종이 군주의 도리, 인재 등용 같은 지침을 위징 등 신하들과 논한 책이다.

그러나 박 당선인은 이런 환경에서 느꼈을 법한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다. 이 시기 그를 만났던 전직 청와대 출입기자는 “한 번도 어렵다거나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과묵했고 잘 들었다. 기자들이 무슨 말을 하면 끄덕끄덕하며 웃거나 할 뿐 코멘트를 잘 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김민하 전 총장도 “담담하면서도 조용하게 이겨내는 게 보였다. 고통과 슬픔을 표시하지 않았다. 허영, 건방, 오만은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박 당선인의 이런 성격은 예상 밖의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이른바 ‘윤필용 사건’으로 1973년 불명예스럽게 소장으로 예편하고 투옥됐던(법원은 지난해 이 사건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윤필용 장군은 1980년 한국도로공사 사장이었다. 경기 성남시의 도로공사 본사에는 훌륭한 테니스 코트가 있었다. 윤 장군과 잘 알던 김 전 총장이 “박근혜를 불러서 테니스를 함께 치자”고 제의하자 윤 장군은 “(박 당선인이) 오라고 하면 오겠느냐”고 반문했다. 이런 상황을 김 전 총장이 전하자 박 당선인은 흔쾌히 “가겠습니다. 만나야지요. 다 지나간 일인데요”라고 답했다.

박 당선인이 도로공사 본사를 찾은 날, 그곳에는 윤 장군과 박 전 대통령 시절 경호실 차장을 지냈던 인사를 비롯해 육군사관학교 8기생들이 여럿 와 있었다. 박 전 대통령이 아꼈던 이들이었다. 그들은 박 당선인을 깍듯하게 대했다. 김 전 총장은 “윤 장군이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박 당선인에게 ‘박 대통령께 누를 끼쳐 죄송하다. 사죄한다’고 하더군요”라고 회상했다. 아버지를 대신해 윤 장군과 화해를 한 셈이었다.

1977년 ‘충북 새마음 갖기 궐기대회’를 마친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환송 인파에 웃으며 답례하고 있다. 동아일보DB
▼ “5공, 朴헌납주식 軍스리쿼터로 실어가” ▼

칩거-아버지의 이름으로 2


박 당선인을 직접 만났던 안병호 전 수방사령관도 그의 내적인 강인함을 평가했다.

1980년 하반기 박 당선인은 신당동 집과 서울 성북동 집을 오가며 기거한 것으로 보인다. 성북동 집은 신기수 당시 경남기업 회장이 전두환 합수본부장의 말을 듣고 지었다고 알려져 있다. 박 당선인은 이듬해 성북동 집으로 이사했다. 안 전 사령관에 따르면 1980년 전 전 대통령이 취임한 직후 전두환 정부는 박 당선인과 두어 차례 접촉을 했다. 박 당선인이 소유하고 있다고 알려진 주식을 돌려받고자 했다는 것.

“3공화국 때 공화당 김성곤 재정위원장 등이 박 전 대통령 퇴임 후 자제들이 생활하는 데 쓸 수 있도록 기업들의 주식을 기부받았다는 거였습니다. 그걸 국고에 헌납시키기 위해 청와대 인사를 보냈지만 박 당선인이 ‘저 사람은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당시 노태우 보안사령관의 비서실장이던 안 전 사령관이 대신 박 당선인을 만나게 됐다. 박 당선인이 그에게 전화로 알려준 곳이 바로 음식점 삼청각 인근 성북동 집이었다.

“일주일에 두어 번, 두 시간가량 만났습니다. 제가 읽은 책이나 역사, 인생 이야기 등을 나누면서 주식을 국고에 헌납해야 하는 이유를 말했지요. 그러면서 박 당선인이 아주 강인하고 논리정연하다는 걸 알았습니다. 스물아홉 살 정도였음에도 말을 하는 데 막힘이 없더군요. 4개월이 지나자 박 당선인이 국고에 헌납하겠다고 했습니다.”

안 전 사령관에 따르면 당시 문화공보부 차관이 주식을 인수했다. 군용 스리쿼터(0.75t 트럭)에 싣고 왔다고는 들었지만 주식이 어디에 있었는지, 전두환 정부가 그것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이때 박 당선인은 몸이 그리 좋지 않았다. 자서전에서도 밝혔듯 국장을 치르는 동안 충격과 정신적 고통으로 몸이 부항 뜬 듯한 멍 자국으로 뒤덮였다. 그 후유증 때문인지 박 당선인은 국군서울지구병원에서 진료를 받기도 했다. 간혹 안 전 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테니스를 치고 싶다”고 하면 보안사 테니스코트에서 테니스 사병과 함께 칠 수 있도록 했다.

안 전 사령관은 그즈음 ‘특정인’을 염두에 두고 박 당선인에게 남자를 만나보는 게 어떠냐고 넌지시 떠봤다. 그러자 박 당선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결혼하지 않겠습니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적이 많습니다. 그러니 결혼해서 아기를 낳아도 어떻게 잘 돌볼 수 있겠습니까. 제대로 된 아기를 낳을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는 그 뒤로 결혼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박 당선인은 함께 테니스를 치던 교수들에게는 약간 다른 태도를 보였다. 그는 “교수님들과 만나면 마음이 편하다”라면서 농담조로 “결혼하고 싶다”고 한 적도 있다고 한다. 교수들이 “중신을 서겠다”고 하면 “교수님들은 못 믿겠어요”라며 빠져나갔다고 한다.

전두환 정부 시절 박 당선인의 공식적 외부 직함은 영남대 재단이사장, 재단이사와 육영재단 이사장이 전부다. 1980년 4월 영남대 이사장이 되지만 학생들의 거센 반대로 7개월 만에 물러나고 재단이사로만 등재됐다. 박 당선인은 노태우 정부 시절로 접어들면서 비로소 세상을 향한 걸음을 다시 내딛는다.


세상에 나서다(1988년 8월∼1990년 11월)… 배신의 트라우마

1988년 8월 13일 오전, 승용차 한 대가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로 들어섰다. 차 안에는 육영수 여사 14주기를 이틀 앞두고 육 여사와 박 전 대통령 묘역에 참배하러 온 박 당선인이 타고 있었다. 박 당선인은 무작정 그를 기다리고 있던 여성 월간지 ‘주부생활’ 기자의 인터뷰에 순순히 응했다. 마치 작정한 듯 그는 8년간의 ‘칩거’에서 벗어났다. 이후 1990년대 중반까지 그는 쉴 새 없이 각종 언론과 인터뷰를 했다.

이유는 단 하나. “아버지가 하신 일에 대한 왜곡과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일” 때문이었다. 박 당선인은 1991년 1월 6일자 일기에 이렇게 썼다. ‘왜곡을 바로잡기 위해 기념사업(1989년 창립한 ‘박정희 전 대통령·육영수 여사 기념사업회’를 말함)을 시작하기 이전의 세월, 나의 생의 목표는 오로지 아버지에 대한 것이었다.’ 전두환 정권의 종결과 민주화 바람으로 운신의 폭이 넓어지자 실추된 박 전 대통령의 ‘명예회복’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이다.

1989년 5월 19일에는 MBC ‘박경재의 시사토론’에 나와 1시간 50분 동안 자신의 아버지와 아버지의 시대를 적극 변론했다. 이때 “5·16은 구국의 혁명이라고 믿는다” “자주국방과 자립경제를 이루기 위해 유신을 하셨다” 같은 발언이 나왔다. 인터뷰에 대한 시민의 반응은 긍정과 부정으로 엇갈렸다. 당시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은 이 방송을 보고 박 당선인에게 편지를 보냈다. ‘유신헌법이 민주주의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이해시키는 데 곤란한 것은 사실이나, 박 대통령께서 사리사욕을 위하여 장기집권을 한 것은 아닌 것이, 급서하신 후 모든 진실이 증명되었습니다.’

그러나 박 당선인을 지난 8년간 괴롭혔던 ‘배신의 트라우마’는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1988년 10월 18일 국회가 영남대 국정감사를 벌였다. 사립대학교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부정입학 사건으로 심화된 영남대 사태 때문이었다. 영남대 학생과 교수들은 박 당선인과 추종세력이 영남대 재단을 떡 주무르듯 한다며 박 당선인과 이들의 퇴진을 주장했다. 국정감사에서도 여야 의원들의 주요 타깃은 박 당선인이었다.

그는 그해 11월 3일 영남대 재단이사직도 내놓았다. 박 당선인은 이틀 후 인터뷰에서 “애초에 영남대와 아무런 인연이 없었기 때문에 미련이 전혀 없다”며 “학생은 물론이고 교수들도 재단 퇴진, 유신잔당 퇴진을 외쳤다”고 불편한 속내를 드러냈다.

당시 영남대에 재직했던 한 대학교수는 “박 전 대통령이 서거할 때 학교 교무처장, 사무처장 같은 핵심 보직에 있던 교수나 그들의 제자가 나중에 박 당선인이 밀려나고 관선이사가 파견돼 총장직선제가 실시된 뒤 줄줄이 영남대 총장에 올랐던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고 말했다. 학교 정관에서 ‘교주(校主)’로 규정한 박 전 대통령이 살아 있을 때 영남대에서 핵심 보직을 맡았던 인사들이 시절이 바뀌자 박 당선인을 뒤엎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박 당선인에게 두 번째 배신의 트라우마(정신적 외상)가 생겼을 것”이라고 말했다. 심복에 의한 아버지의 죽음과 시대에 의한 아버지의 매도라는 배신에 이어 믿었던 사람들이 죽은 아버지에 이어 자신마저 배신하는 상처를 겪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박 당선인의 ‘박정희 바로 세우기’ 의지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기념사업회는 1989년 10월 26일 박 전 대통령 10주기를 맞아 국립묘지에서 추모행사를 성대하게 치렀다. 이날 연인원 15만 명이 묘소를 찾았다. 박 당선인은 전두환 정부 출범 직후 해체된 새마음봉사단을 ‘근화봉사단’으로 재결성해 회원 20여만 명의 조직으로 키웠다. 또 24개면 타블로이드 회보인 ‘근화보’를 제작해 전국에 배포했다. 당시 그를 지켜봤던 한 인사는 “박 당선인이 근화보의 사설과 대부분의 글을 직접 썼다”며 “이 시기에 그는 농담도 잘하고 때때로 Y담(성적 농담)을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만큼 기분이 한껏 고양돼 있었다.

즐거운 일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육영재단은 1987년에 이어 1990년에 다시 분규에 휩싸였다. 그 진앙에는 과거 퍼스트레이디 시절 박 당선인 옆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다 여러 물의를 빚기도 했던 최태민 씨가 있었다. 1980년 신군부에 잡혀가 조사를 받고 강원도로 쫓겨났던 그가 복귀하면서 재단 내에 갈등이 도져버렸다. 더욱이 이번에 박 당선인과 대치한 사람은 동생 근령 씨였다. 양측 지지세력 간의 충돌이 몇 차례 생기자 박 당선인은 1990년 11월 3일 이사장직을 동생에게 물려줬다.

박 당선인은 그해 12월 2일 일기에서 ‘…그런 일의 전말을 기록이랍시고 일기장에 적기에는 내 마음이 너무 아프고 무겁다. 악몽 같은 일들을 적어 무엇하랴’라고 토로했다. 그는 다시 혼자만의 세계로 들어갔다.


2005년 10월 한나라당 대표 시절의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대구 팔공산 동화사에서 합장을 하고 있다. 동아일보DB
▼ 서대문형무소 찾아 교수형 밧줄 쓰다듬더니… ▼

‘토털 블랙아웃’(1990년 11월∼1993년 11월)


“많이 외로웠을 것이다.”

박 당선인 측 한 인사는 육영재단 이사장직을 물러난 뒤 서울 강남구 삼성동 자택에 머물던 그를 이렇게 표현했다. 사실상 야인(野人)이었다. 공식 직함이 거의 없었던 셈이니 공식적인 자리에 참석할 일도 별로 없었고, 동생에게 이사장직을 ‘물려줬다’고는 하지만 서운한 감정이 없을 리 없었다.

박 당선인은 자택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논현동 경복아파트 인근의 실내테니스장에서 과거 청와대 출입기자, 또는 동네 사람들과 자주 테니스를 쳤다. 한 번에 두 시간가량. 가끔 백화점이나 쇼핑센터에 들러 테니스화 같은 운동용품이나 생필품을 사왔고, 시간이 나면 꽃이나 바닷속을 소재로 서양자수를 놓거나 뜨개질을 하기도 했다. 아버지의 기일에도 공식 추모행사에 참석하지 않고 혼자 조용히 참배하거나 1년 중 다른 때에 가끔씩 찾곤 했다.

훗날 “이 같은 시간적 여유를 가져본 적이 없다”고 털어놓은 이때 박 당선인은 수도권과 지방의 문화재나 유적을 찾아 가는 답사여행을 부정기적으로 했다. 청와대 출입기자 출신의 언론인들이 종종 동행했다. 목적지는 대부분 박 당선인이 정했다. 병인양요, 신미양요의 격전지였던 강화도 초지진을 찾아 대포를 쓰다듬기도 하고, 경기 남양주의 다산 정약용 생가를 찾기도 했다. 강원 영월의 단종 유배지인 청령포와 묘지에도 다녀왔다.

한국의 전통 음식과 술, 야생화에도 관심을 갖고 곳곳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경기 용인 ‘민속촌’을 몇 차례 들르기도 했고 산이나 들, 강에서 난 열매나 약초, 꽃을 가지고 즉석 산채요리를 만들어내는 식당이 경기 광주에 있다고 하자 그곳을 찾기도 했다. 이 같은 여행은 정치에 입문할 때까지 간간이 이어졌다.

동행했던 한 언론인은 “호기심의 차원이 아니라 항상 국가관을 가지고 의식적으로 답사를 하는 것 같았다”며 “스케줄을 본인이 짰는데 점심을 먹다가 지체되더라도 일정에 있던 장소는 빠뜨리지 않고 둘러봤다”고 말했다. 또 다른 언론인은 “박 당선인은 새로운 곳이 생겼다고 하면 꼭 가자고 했다”고 말했다. 서울 중구 필동에 한옥마을이 조성됐다거나, 서울 남산 외인아파트 뒤쪽으로 산책로가 생겼다는 뉴스를 보면 호기심이 발동했다는 것이다. 지난달 11일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업무보고 첫날에 문화재청이 이례적으로 단독 보고를 한 데는 박 당선인이 야인 시절부터 키워온 문화유적 사랑이 한몫했다는 관측이 나온다.

그런데 이 시기 박 당선인의 일기를 보면 심경의 변화가 두드러진다.

1991년 4월 28일 일기는 ‘이제 나이 40. 앞날이 적지 않게 남아 있는 나이이나, 장래에 인간사회 안에서 하고 싶은 일이나 꿈이 없다’고 토로했다. 하지만 1년이 지난 1992년 5월 21일 일기에서는 ‘지나간 40년을 돌이켜 보면…그런 생을 다시 살라고 한다면 차라리 죽음을 택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요즘에는 난생처음으로 산다는 것이 기쁘고 고마운 일이라는 느낌이 든다’고 적었다. 그 뒤 일기에서도 ‘지금 누리고 있는 마음의 평화’라든지, ‘올해는 지난 세월 느껴보지 못했던 삶의 또 다른 면을 느껴본 해이다’라는 식의 표현이 보인다.

그 해, 1992년에 박 당선인의 몸과 마음에 이런 변화를 가져온 것이, 혹은 일이 무엇인지 알 길은 없다. 다만 이 무렵 박 당선인은 단전호흡을 시작한다. 그에게 단전호흡을 강력히 권유한 사람은 이정규 전 서대문구청장이다.

이 전 구청장은 박 당선인이 퍼스트레이디 시절 청와대 비서실에서 서기관으로 근무했고 1980년대 초에 청와대를 나와 서울시 공무원으로 있으면서 단전호흡과 국선도 수련을 시작해 꾸준히 훈련했다. “돌봐줄 사람도 없을 텐데 건강관리 차원에서 해보시라고 하면서 단전호흡 비디오테이프와 교재를 갖다 드렸습니다.”

박 당선인은 이것들을 가지고 혼자 수련에 들어갔다. 때때로 이 전 구청장에게 전화를 걸어 호흡법을 물어보기도 했다. 그가 보기에 박 당선인은 상당한 경지에 올라서 있다. 어떨 때 보면 호흡을 통해 자신의 기(氣)를 상대방에게 비춰 상대의 속을 꿰뚫어 보는 능력까지 도달한 것 아닌가 싶은 경우도 있다고 한다.

단전호흡 수련 덕택이든, 아니면 젊은 시절부터 꾸준히 동서양 철학책, 유교 불교 기독교 경전을 섭렵하며 닦은 사색의 결과이든 ‘꿈이 없다’던 박 당선인은 ‘마음의 평안’을 되찾으며 책을 쓰게 된다. 움츠렸던 발을 조심스럽게 세상 밖으로 내밀었다.


다시 세상으로(1993년 12월∼1997년 12월)

박 당선인의 첫 번째 책은 1979년 구국여성봉사단에서 펴낸 ‘새마음의 길’이다. 충효사상을 강조하는 ‘새마음 운동’을 보급하기 위해 전국 대도시와 기업을 돌며 한 연설을 모은 책이다. 연설문은 모두 그가 직접 썼다. 1993년 11월에 펴낸 두 번째 저서 ‘평범한 가정에 태어났더라면’은 그전 3년간의 침묵을 털어내는 저서다. 1990년부터 3년간 자신이 써놓은 일기 가운데 발췌를 해서 엮었다.

책을 내고 난 뒤 박 당선인은 신문과 방송 인터뷰를 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다시 세상에 알렸다. 정치를 하려는 것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고, 그의 대중성을 인식한 정치권에서는 공식, 비공식으로 입당을 제안하기도 했다.

시민들 사이에서의 인기는 문화유적 답사를 하러 들른 지역에서도 체감할 수 있었다고 한다. 특히 지방에서 더욱 열기가 높았다. 박 당선인이 일행과 함께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들어갔다 나오면 어떻게 알았는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때로는 떡이며, 고구마, 과일을 싸와서 직접 손에 쥐여주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동행했던 한 인사는 “박 당선인의 인기가 정치를 하기 전부터 대단했다”고 말했다.

1995년 서대문구청은 관내 서대문형무소를 성역화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서대문형무소가 자리한 터는 공원화가 돼있었지만 형무소 건물은 사실상 버려진 상태였다. 그때 박 당선인이 당시 이정규 구청장에게 “형무소를 둘러보고 싶다”고 했다. 봄이었지만 눈보라가 쳤고 기온은 평년에 비해 무척 낮았던 날 박 당선인은 검은색 치마정장을 입고 서대문형무소를 찾았다.

그는 이 구청장의 안내를 받으며 을씨년스러운 형무소 복도를 걷다가 감옥 문고리를 만지고 밥이 드나드는 배식구에 손을 집어넣어 보기도 했다. 그렇게 돌아보다 마지막으로 알전구 하나만 켜져 희미하기만 한 사형장에 이르렀다. 교수형에 처해질 사형수가 앉는 의자, 목을 매는 밧줄, 바닥이 열리게 만드는 녹슨 손잡이도 일일이 손으로 만져봤다. 박 당선인은 사형장 지하실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시신이 떨어질 때의 충격을 완충하는 타이어가 있었다. “타이어를 세 번 쓰다듬는데 표정이 아주 엄숙했어요.” 그것으로 마지막일 줄 알았는데 박 당선인은 지하실에서 시신을 밖으로 들어내는 동굴로 걸음을 옮겼다. 약 70m 되는 동굴에는 역시 전구 하나만 켜져 있었다. 박 당선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들어가더니 끝까지 걸어갔다 되돌아왔다. 이 전 구청장은 “그 장면을 보면서 ‘저 양반이 평범한 삶을 살 사람은 아니다’라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박 당선인은 1990년대 중반쯤 경제공부를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1997년 외환위기가 닥치기 몇 개월 전, 그는 서대문구청의 초청으로 지역 유지 300여 명 앞에서 한국 경제에 대한 특강을 2시간가량 한 적이 있다.

신한국당(현 새누리당)에 입당한 직후인 1998년 박 당선인은 ‘고난을 벗 삼아 진실을 등대 삼아’라는 저서를 펴냈다. 1993년에 낸 ‘평범한 가정에 태어났더라면’이라는 일기집을 더 시간적으로 확장한 책이다. 1993년 책에서는 은둔의 3년이라고 할 수 있는 1990∼1993년의 일기를 묶은 장(章)에 ‘평범한 가정에 태어났더라면’이라는 제목을 붙인 반면, 1998년 책에는 같은 기간을 묶은 장에 ‘굴절된 역사의 진실을 찾아서’라는 제목을 붙였다. 본격적으로 정치를 할 자세를 가다듬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에필로그… 18년+18년

박 전 대통령은 18년간 통치했다. 박 당선인은 18년간 세상에서 멀어져 있었다. 박 당선인은 자서전에서 1979년 11월 21일 청와대를 나와 1997년 12월 10일 신한국당에 입당하기까지의 기간을 ‘외롭고 긴 항해’라고 썼다. 박 당선인 자신은 한 인터뷰에서 “그 시절이 은둔과 칩거로 치부될 때 나는 쓴웃음만 나온다”고 했다. 그 18년간 “대한민국 하늘 아래서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다.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국민은 자신의 대통령에 대해, 그 18년의 삶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 한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재테크 정보




많이 본 뉴스

종합

정치

국제

사회

스포츠

연예

댓글이 핫한 뉴스

오늘의 dongA.com

핀터레스트 트위터 페이스북 마이뉴스 설정


모바일 버전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