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승헌]MB가 티타늄 안경 쓰고 한 걱정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1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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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헌 정치부 차장
이승헌 정치부 차장
얼마 전 서울 강남의 한 음식점.

이명박 전 대통령(MB)이 청와대 시절 참모들과 모였다.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을 거론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말 안 해도 MB 생각은 다 안다. 밥맛만 떨어뜨렸을 것이다. 한 참석자가 분위기를 바꾸려고 MB가 이날 쓴 안경 이야기를 꺼냈다. 평소 쓰던 뿔테 안경이 아니라 날렵한 티타늄 소재 안경이었다고 한다. MB는 잡어회를 된장에 푹 찍어 먹은 뒤 평소 멀리하던 소주잔을 들었다.


“사람이 갑자기 어디로 가기 전엔 몸을 가볍게 해야 하는 법이야. 그래서 바꿨어.”

폭소가 터졌다. 하지만 오래가진 못했다. 자신들이 모셨던 대통령의 농담치곤 너무 쓸쓸했기 때문일 것이다. 검찰의 적폐청산 칼날을 예감한 것 아니겠느냐고 참석자들은 분위기를 전했다. MB는 몇 잔을 더 마셨다.

그런 MB는 12일 바레인으로 강연을 떠나기 전 결국 적폐청산 드라이브를 정치보복이라고 비난했다. 주변 이야기를 들어보면 김관진 전 국방장관 구속이 그동안 은인자중하던 MB를 움직이게 했다. 김 전 장관이 군 사이버사 댓글 의혹으로 구속됐으니 검찰의 다음 목표는 직속상관인 자신일 것이라는 위기의식이다. 동시에 김 전 장관의 구속 자체에 쇼크를 받았다는 말도 있다. MB가 바레인으로 떠나면서 “중차대한 시기에 외교안보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한 게 아주 빈말은 아닐 것이다.

요즘 우리가 적폐청산이란 ‘정치적 내전’에 정신이 팔려 간과하고 있는 게 하나 있다. 외국에서 전직 국가정보원장 3명, 전직 국방장관(겸 국가안보실장) 1명이 동시 구속되어 있는 이 전대미문의 상황을 심상치 않게 보고 있다는 거다. 특히 대북 정보를 총괄했던 사람들이 줄구속되는 게 북핵 문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주시하고 있다. 국정원장은 미국으로 치면 중앙정보국(CIA) 국장이다. 외신들은 이번 사건을 보도하며 국정원장을 우리의 공식 영어 표현인 NIS(National Intelligence Service) Director로 잘 쓰지 않는다. 오히려 Spy Chief(정보 수장)라고 쓴다. 이번 사안을 어떤 프레임에서 보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일각에선 “국정원이 시스템으로 돌아가는데 전직 국정원장들 구속한 게 안보와 무슨 상관이냐”고 한다. 하지만 정보는 사람 장사다. 신뢰를 주고 상대방의 마음을 사는 일이다. 워싱턴 특파원 시절, 주미대사관 소속의 한 국정원 직원이 동생뻘 되는 미 정보기관 관계자를 사귀려고 한식당에서 못 마시던 소주 접대를 하던 모습을 짠하게 지켜봤던 기억이 있다. 그 미국인은 한참 뒤에야 국정원 직원에게 마음을 열었다고 한다. 그 사람이 요새 한국 정보기관을 어떻게 볼지는 물어볼 것도 없다.

아무리 안보가 중요해도 잘못된 게 있으면 고쳐야 한다. 국정원 특수활동비를 불법적으로 청와대에 전달하는 게 우리의 안보 능력을 높인다고 할 사람은 없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전직 국정원장, 국방장관을 무슨 잡범 취급하는 게 안보에 꼭 도움이 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칼럼을 마무리할 무렵, 회사 앞에서 알고 지냈던 워싱턴 싱크탱크 관계자를 우연히 만났다.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들을 이끌고 외교부, 국방부를 방문한 뒤 청계천에 놀러 왔다. 이런저런 말을 하다 결국 적폐청산 이야기로 흘렀다. 문재인 정부에 우호적인 그는 기자에게 “이번엔 문재인 정부가 너무 나간 것 아니냐. 한국이 별일 없길 바란다(Gone too far. Good luck)”고 했다. 이름만 대면 청와대나 외교부가 대번에 알 만한 그가 하도 돌직구를 날리기에 기자가 “실명으로 인용해도 되냐?”고 했더니 “오케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냥 익명으로 남겨두련다. 미국인 친구가 ‘적폐 외국인’으로 찍힐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이승헌 정치부 차장 ddr@donga.com
#이명박#mb#문재인 정부#적폐청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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