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범벅에도 불구속…고인 돼서야 벗어난 지옥같은 25년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0월 24일 19시 1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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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서구 등촌동의 한 아파트 주차장에서 전 남편 김모 씨(48)가 휘두른 흉기에 숨진 이모 씨(47·여)는 고인(故人)이 돼서야 끔찍했던 전 남편의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결혼생활 동안 지속적으로 이 씨를 폭행했던 김 씨는 이혼한 뒤에도 이 씨를 찾아가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이 씨는 휴대전화 번호를 10여 차례 바꾸고, 가정폭력 피해여성 보호소 등 6곳의 거처를 전전하며 김 씨를 피하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김 씨는 22일 이 씨가 살던 아파트 주차장에 숨어 있다가 아침운동을 하러 가던 이 씨의 복부와 목 등을 흉기로 13차례 찔러 살해했다.

이 씨가 지옥 같은 25년을 보내는 동안 수사기관과 법원은 힘이 되지 못했다. 가족이 경찰에 신고해도 김 씨는 풀려났고, 법원의 접근금지명령도 그를 막지 못했다.

● 가혹한 폭행에도 불구속…접근금지 명령도 안 먹혀

24일 강서구의 한 장례식장에 차려진 이 씨의 빈소는 화환 하나 없이 썰렁했다. 둘째 딸 A 씨(22)는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아빠는 평소 엄마와 세 딸들을 개잡듯 팼다”며 “아빠가 풀려나면 다음은 우리 세 자매 차례다. 살려 달라”고 호소했다. A 씨는 전날 청와대 국민청원 온라인 게시판에 “아빠가 사형을 선고받도록 청원한다”는 글을 올렸다.

A 씨는 “엄마와 결혼한 후부터 아빠는 수시로 엄마를 폭행했다. 화가 나면 집 안에 물건을 집어 던졌다. 깨진 술병을 손에 쥐고 가족들에게 겁도 줬다. 저와 언니 동생도 함께 맞았다”고 말했다.

22년 간 남편의 폭력에 시달려온 이 씨가 이혼을 결심한 건 2015년 2월. 친구들과 제주도 여행을 다녀온 날이었다. 남편 김 씨는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차에서 내리는 이 씨를 마구 때렸다.

이 씨의 동생 B 씨는 “당시 김 씨가 ‘재미있는 걸 보여줄 테니 집으로 오라’고 해서 갔더니 언니의 얼굴에 온통 피멍이 들고 눈과 입은 퉁퉁 부어 신음조차 내지 못했다. 언니의 흰 바지가 피와 진흙으로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고 기억했다.

그날 A 씨의 신고로 김 씨는 경찰에 체포됐지만 몇 시간 뒤 풀려났다. 경찰은 김 씨를 상해죄로 검찰에 불구속 송치하면서 이 씨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긴급임시조치만 취했다. 이 조치는 어기더라도 과태료 처분만 받기 때문에 실효성이 떨어진다. 법원도 김 씨에 대해 접근금지 명령을 내렸지만 김 씨는 개의치 않았다. 딸들을 통해 이 씨의 거처를 집요하게 확인하려 했다. A 씨는 “당시 아빠가 카카오톡으로 엄마에게 일가족 살인사건 기사를 보내면서 ‘너랑 딸들 다 죽이겠다’ ‘너에게서 소중한 것을 다 빼앗아가겠다’고 했다”고 말했다.

이 씨는 김 씨가 들이닥칠까 우려해 거처와 휴대전화 번호를 수시로 바꿨다. 세 딸들과도 만남을 최소화하면서 카카오톡으로만 연락했다. 이 씨의 언니 C 씨는 “김 씨가 길거리에서 자신을 알아볼까봐 동생이 늘 모자를 푹 눌러쓰고 얼굴도 못 내놓고 다녔다”고 전했다.

● 피해자 차량에 GPS까지 달아

2015년 9월 이혼한 뒤에도 이 씨의 공포는 계속됐다. 김 씨는 2016년 1월 막내딸의 뒤를 밟아 서울 강북구의 한 원룸에 숨어 지내던 이 씨를 찾아냈다. A 씨는 “당시 아빠가 원룸 앞에서 칼과 밧줄을 들고 찾아와 ‘죽이겠다’고 위협하자 이웃이 경찰에 신고했다”며 “‘처벌을 원하냐’는 경찰 질문에 엄마는 ‘처벌 수위가 약하지 않냐’고 되물었고 경찰이 ‘맞다’고 해서 그냥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A 씨는 “엄마는 수십 년 간 폭행을 당하면서 직접 경찰에 신고한 적 없다”고 했다. 이 씨의 보복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후 이 씨는 김 씨를 피해 3차례 더 이사했다. 올 3월 서울 강서구 등촌동의 한 아파트에 자리를 잡고서야 이 씨는 떨어져 살던 두 딸과 함께 지냈다. 막내딸은 엄마와 함께 살며 검정고시에 붙어 내년 대학 진학을 앞둔 상태였다. 하지만 이 씨는 그토록 두려워해왔던 최악의 상황을 끝내 피하지 못했다.

경찰은 24일 김 씨에 대해 살인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경찰 조사 결과 김 씨는 범행 전 이 씨의 차량에 몰래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을 설치해 이 씨의 위치를 파악했고, 범행 며칠 전부터 아파트 주변을 배회하는 등 치밀하게 준비한 것으로 파악됐다.

이지훈기자 easyhoon@donga.com
고도예기자 ye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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