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문닫자 텅 비어버린 원룸촌… “대기업 떠난 것과 같아”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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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출산 속 위기의 대학]<1> 생계마저 위협받는 지역사회

30인분용 대형 밥솥에 냉기가 돌았다. 여기에 하루 대여섯 번씩 밥을 안치던 때가 있었다. 80석 규모인 홀은 학생들로 붐볐고 남편과 조리사, 주방 아줌마까지 3명이 일해도 주문이 밀렸다. 지금 주방에는 남편 혼자서 일을 한다. 불 앞에 있을 때보다 홀에 나와 있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18일 하루 종일 5000원짜리 짜장면 두 그릇을 팔았다.

2월 폐교를 앞둔 전북 남원시 서남대 인근 상가들은 18일 을씨년스럽게 텅 비어 있었다. ‘○○PC방, △△서점, ◇◇주점’ 등 빛바랜 낡은 간판이 활발히 영업했던 과거를 짐작하게 할 뿐이었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불 켜진 곳은 장옥자 씨(54·여) 부부가 운영하는 중국집뿐이었다.

장 씨의 고향은 남원이다. 1996년 전 재산을 들여 3층짜리 건물을 샀다. 2층은 중국집으로, 1, 3층은 원룸으로 대학생들에게 세를 놓았다. 10여 년간 몸은 고돼도 절로 웃음이 났다. 인근 상인들도 그랬다. 하지만 2010년 즈음부터 학생 수가 줄었다. 재단 비리 뉴스가 잇따랐고 급기야 폐교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부부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서남대 뉴스를 검색했다. ‘폐교만은 막아 달라’고 빌었다. 지난해 12월 서남대 폐교가 확정됐다. “이젠 다 끝났죠.” 장 씨의 말에 홀에서 쉬던 남편은 깊은 한숨만 쉬었다.

○ 폐허로 변해 버린 대학가 원룸촌

폐교를 앞둔 서남대와 강원 동해시 한중대 인근에는 ‘대학가’였던 흔적만 남았다. 지난해 12월 교육부 폐교 결정이 나왔고 겨울방학이 시작되면서 그나마 남아 있던 학생들이 떠났다. 끝까지 버티던 편의점도 문을 닫았다. 그런데도 아직 떠나지 못한 이들도 있다. 대개 건물을 소유한 원룸 주인들이었다.

한중대 인근의 ‘OO원룸’에 사는 학생은 더 이상 없다. 한동안 비어 있던 무보증 월세 20만 원짜리 방에는 얼마 전 동해시 항만공사에 나가는 일용직 근로자가 몇 명 들어와 있다. 지난해만 해도 월세 40만 원을 받았으나 지금은 나가지 않아 절반으로 낮췄다. 월세와 사람이 적다 보니 전기료 난방비 수도료를 빼면 오히려 손해다. 원룸 주인 정덕규 씨(74)의 수입은 정부로부터 매달 받는 100만 원의 보훈급여뿐이다. 그는 베트남전 참전용사였다. “월세만으로 200만 원 넘게 벌었는데 이제는 살기도 빠듯해 앞으로 어떻게 생계를 꾸릴지 막막합니다.”

서남대 인근의 유일한 원룸촌인 율치마을 사정은 더 심각했다. 한때 서남대생 1000여 명이 살던 마을은 이미 폐허로 변했다. 무보증 월세 5만 원짜리 방도 찾는 사람이 없다. 헐값에 건물을 매물로 내놓아도 팔리지 않았다. 방치된 원룸 곳곳은 곰팡이가 피었고 원룸 입구에는 주인 없는 우편물만 수북했다. 율치마을 박병오 통장(68)은 “예전엔 마트가 9개나 됐고 매일 밤 마을회관 앞에 포장마차가 섰는데…. 이제 하나 남은 마트도 곧 문을 닫고 민심까지 흉흉해졌다”고 말했다.

○ 마을뿐 아니라 도시 전체가 타격

폐교의 충격은 대학 인근에서 도시 전체로 퍼져 나갔다. 경기 변동에 가장 민감한 택시기사 수입부터 줄었다. 서남대는 시내와 떨어져 있어 학생들이 자주 택시를 이용했다. 택시를 잘 이용하지 않는 노인이 많은 남원에서 서남대생들은 택시기사들에게 귀한 손님이었다.

30년간 택시 운전을 한 전재중 남원시개인택시조합장은 “예전엔 하루 10만 원도 거뜬히 벌었는데 이젠 5만 원도 못 가져간다”며 “지역 경기가 완전 바닥이다. 외환위기 때보다 힘들다”고 말했다. 2010년대 들어 학생 수가 감소하면서 남원지역 택배 물량도 줄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0년 1107만 통이던 남원시의 배달 물량은 2015년 780만 통으로 급감했다.

남원시내 유흥가에는 한 건물 건너 문을 닫은 가게 골목 풍경이 쉽게 눈에 띄었다. 동해시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이정학 동해시의원은 “학생 1000여 명이 빠져나가니 지역 상권이 완전히 절멸한 상태”라고 밝혔다.

○ “지역 대학은 우리에게 대기업”

남원과 동해 모두 변변한 기업이나 공장이 없다. 대학이 지역경제의 가장 큰 버팀목이다. 대학 덕분에 그나마 젊은층과 외지인이 모였고 이들이 쓰는 돈이 지역경제를 돌게 했다. 학생, 교직원은 아니어도 지역주민 상당수가 대학이 간접적으로라도 생계와 연관이 있는 셈이었다.

전억찬 한중대 공립화추진 범시민대책위원장은 “다른 지역에선 관심 없겠지만 동해 주민에게 한중대는 지역문화와 교육은 물론이고 경제의 중심”이라고 말했다. 이정린 서남대 정상화공동대책추진위원장 역시 “가장 큰 공장이 직원 500여 명인 남원에서 서남대는 현대나 삼성과 다름없었다. 우린 대기업을 잃은 것과 마찬가지”라고 호소했다.

의대가 있는 서남대의 폐교로 의료 공백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남원은 전북 장수 임실 순창, 전남 곡성 구례, 경남 산청 함양군을 아우르는 지리산권의 중심지로 도립 남원의료원이 인근에서 가장 큰 병원이다. 낙후지역이라 의사 구하기가 어려운 남원의료원으로서는 서남대 의대생은 젖줄이었다. 하지만 서남대 의대생이 타 지역으로 빠져나가면 앞으로 의사 구하기가 더욱 힘들 것이라는 우려가 컸다.

주민들은 교육부가 대학 구조조정과 비리 재단 퇴출이라는 명분 아래 지역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정상화 노력 없이 섣불리 폐교를 결정했다며 원망했다. “죄는 비리 재단이 짓고 피해는 학생, 교직원, 지역주민이 본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서남대 정상화를 위해 교육부, 국회, 청와대까지 찾아갔던 이 위원장은 정부의 시각이 달라져야 한다고 하소연했다.

“지금 정부 방식이라면 다른 지방대와 지역도 다 죽습니다. 비리 재단을 솎아 내는 것도 좋지만 여기에 생계가 걸려 있는 사람을 봐주세요.”

남원=김호경 kimhk@donga.com / 동해=임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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