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경의 글로벌 인사이더]폭풍우 속 ‘소통의 만찬’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3월 20일 14시 4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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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회동 후 칼바람을 맞으며 돌아가는 공화당 상원의원들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회동 후 칼바람을 맞으며 돌아가는 공화당 상원의원들
미국 동부에는 봄에 폭설, 폭우, 강풍이 자주 발생한다. 흔히 ‘노리스터(Nor’easter)’로 불리는 이 괴물급 폭풍은 동부 해안 쪽에서 발달한 저기압이 강한 바람과 비 눈을 동반해 동부 지역에 많은 피해를 몰고 온다. 지난주에도 뉴욕, 워싱턴 등지를 강타해 정전, 교통 마비, 비행기 결항이 속출했다.

노리스터는 매년 봄만 되면 주기적으로 발생해 동부 지역 주민들은 3,4월에 폭설이나 폭우를 만나도 거의 놀라지 않는다. 워싱턴 특파원 시절에도 “4월에 눈이라니…”하고 툴툴거리며 수북이 쌓인 눈길을 차가운 칼바람을 맞으며 걸은 적이 여러 번 있다.

미국에서 봄에 발생하는 폭설은 별로 놀랄 만한 일이 아니지만 4년 전 3월 첫째 주 노리스터가 워싱턴을 강타했을 때는 흔치 않은 풍경이 벌어졌다. 폭설로 인한 교통마비를 뚫고 공화당의 거물급 상원의원들이 저녁 만찬 회동을 위해 워싱턴의 유서 깊은 호텔인 제퍼슨 호텔로 모여든 것이다. 존 매케인, 린지 그레이엄, 톰 코번 등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공화당 ’대표 선수‘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악천후 속에서도 결석한 의원은 없었다. 머리에 하얀 눈을 맞으면서 12명 전원 출석했다.

공화당 의원들을 초대한 사람은 다름 아닌 민주당 소속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었다. 당시는 연방정부 예산 자동감축(시퀘스터) 문제를 놓고 공화당과 민주당이 서로 잡아먹을 듯 치열하게 대립하던 때였다.

정국이 얼어붙었을 때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민 것은 오바마 대통령이었다. 그는 이날 회동 전 참석 예정 의원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꼭 참석해 달라”고 부탁까지 했다.

이날 대화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호텔을 나서는 공화당 의원들은 웃는 얼굴 속에서 대통령과의 만남이 건설적이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왜 이런 자리가 더 빨리 마련되지 못했는지 모르겠다”(매케인 의원)

“문제 해결을 위한 그랜드 바긴(대타협)이 가능할 것 같다”(그레이엄 의원)

“그동안 우리도 대화하고 싶었다. 타협점을 찾아야 하니까”(코번 의원)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회동이 잘 끝났다고 엄지 손가락을 들어보이는 존 맥케인 공화당 상원의원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회동이 잘 끝났다고 엄지 손가락을 들어보이는 존 맥케인 공화당 상원의원
오바마 대통령은 상원의원들을 만나고 나서는 자신감이 생겼는지 그 다음 주에는 공화당 하원 행사에도 참석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비서실장을 통해 참석을 요청했고 공화당 소속 하원의장은 흔쾌히 수락했다. 워싱턴에서는 화해의 봄바람이 불고 있었다.

오바마 대통령이 처음부터 공화당과 사이가 좋은 대통령은 아니었다. 2009년 1기 집권 초기에 건강보험 개혁법안(오바마케어)을 야심차게 추진했을 때 공화당이 이를 극렬 반대하면서 사이가 벌어졌다. ’공화당과는 대화가 안 되니 어울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 오바마의 기본적인 마인드였다. 공화당 의원들과는 만나지 않는 그는 ’외로운 늑대(lone wolf)‘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특히 2012년 재선 성공에 따른 자신감으로 오바마 대통령은 ’타협보다는 원칙을 지키겠다‘는 태도를 굳히면서 공화당과의 대치 국면은 더욱 악화됐다.

야당과 대화하지 않는 대통령, 냉랭한 정국을 풀려고 노력하지 않는 대통령. 시퀘스터 정국에 대한 국민의 반응은 차가웠다. 그해 초 50%를 넘었던 대통령 정책수행 지지율은 시퀘스터 대치 국면이 시작되자 40%대 초반으로 떨어졌다.

지지율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당황한 오바마 대통령은 대국민 설득 전략에 나섰다. 연설력이 뛰어난 그는 미국 전역을 돌며 ’단상 정치(Podium Politics)‘에 돌입했다. 체육관이나 대형 강당에서 지지자들을 모아놓고 단상에서 “정국 대치를 몰고 온 주범은 공화당”이라고 야당을 비판하는 일장 연설을 한 것이다. ‘야당 탓’을 주제로 전국 투어를 하는 대통령. 장외 여론전이 오히려 국민 불안만 가중시킨다는 비난이 높아졌다. 국민은 지지율 추가 하락으로 답했다. 오바마 지지율은 30%대까지 떨어졌다. 처참한 수준이었다. 국민은 시퀘스터 문제를 몰고 온 공화당보다 이 문제를 대화와 타협으로 풀지 못하는 오바마 대통령의 미숙한 정국 운영에 더 화가 난 것이다.

이 같은 깨달음 속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마침내 공화당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민 것이다. ’불통‘을 타개하기 위해 타협의 정치력을 발휘한 그를 두고 “리더십을 보여줬다”는 호평이 줄을 이었다. 당시 회동에 참석했던 그레이엄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이 먼저 손을 내밀면 우리(야당)가 그 손을 잡는 것은 당연하다”며 “만약 정치권이 대화하지 않는다면 이 나라는 결국 망하게 될 것이다.”

당시 한국에서도 ‘국회 탓’을 하는 대통령이 있었다. 야당에 먼저 손을 내미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먼저 타협의 악수를 청하는 것이 결국 이기는 것이라는 미국의 성숙한 정치 문화가 부러운 순간이었다.

정미경 기자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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