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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커버스토리]100여년전 일본서 건너와 대표적 서민 음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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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커버스토리]100여년전 일본서 건너와 대표적 서민 음식으로

동아일보입력 2011-12-17 03:00수정 2011-12-17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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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소문이 떠돌았다. 앞으로 조선 독립(신탁통치 종료)이 되면 일본말뿐 아니라 옷이던 음식이던 일본 것은 모조리 못쓰게 된다는 소문이었다.

(중략) “아니, 정말이여. 신문에까지 났다는듸. 저 가마보꼬(어묵)는 참 일본 음식이 아니겟지? 조선 사람들도 잘만 먹으닝께.”

“본데야 일본 거지.”

“그렇지 않을 것이여! 아니, 우리는 가마보꼬가 없으면 밥을 먹는 같잖은듸.”(중략)

“그것도 본데는 다 일본 음식이지.”

“아니, 그럴 리가 있을라고? 우리 조선 사람들도 만 가지 요리에 다 쓰고 있는듸. 잔치에 안 쓰나 제사에 안 쓰나? 대체 정말인지 거짓말인지 내 눈으로 그 신문을 꼭 한번 봤으면 속이 시연하겟당게.” (동아일보 1949년 11월 8일자, 소설 ‘해방’, 김동리)

우리나라에서 어묵은 줄곧 서민의 음식이었다. 광복 전후 우리 백성들이 본시 조선음식인줄 알 정도로 어묵은 서민의 삶에 밀착해 있었다.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어묵은 간식이나 밥반찬으로 널리 쓰이는 친근한 식재료가 됐다. 쇠고기나 돼지고기에 비해 값이 싸면서도 양질의 단백질과 꽤 그럴싸한 맛을 전해주는 식품이었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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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후 고급 일본식 어묵탕(오뎅)을 파는 술집들은 사라져갔지만, 어묵의 대중화는 더욱 가속화했다. 어묵은 가난한 연인들과 젊은이들이 추위를 쫓기 위해 애용하는 술안주 겸 군것질거리였다. 특히 ‘오뎅 국물’은 인심 좋은 포장마차에서 그냥 주는 공짜 안주였다.

“아, 좋시다. 그럼 포장마차에나 갑시다.”

“그래요, 오뎅이나 사 주면 먹죠.”

둘은 늘어선 공장들을 지나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구두방에서 양장점까지가 닥지닥지 붙어있는 좁은 골목길이 얼마간 이어지다 나타난 빈터에는 십여 대의 리어카가 늘어서 있었다. 오뎅 국물을 끓이는 김이 포장 속에서 새어나왔고 닭똥집을 굽는 냄새가 멀리까지 퍼져 왔다. (동아일보 1979년 3월 6일자, 소설 ‘달이 뜨면 가리라’, 한수산)

그러나 어묵은 출생의 ‘원죄’ 때문에 눈총을 받는 존재이기도 했다. 광복 직후인 194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까지 신문에 ‘오뎅’이란 말을 없애자는 이야기가 계속해서 올라왔다. 1949년 서울시 사회국은 ‘오뎅집’ 등 왜식간판 일소에 나서기도 했다. 많은 사람이 먹고 있음에도 어묵은 언제나 ‘일본 음식’이란 꼬리표를 달고 다녀야 했다.

하지만 ‘다꾸앙’이 단무지로 바뀌고, ‘이나리스시’가 유부초밥으로 바뀌었어도 여전히 오뎅이란 명칭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것은 어묵의 고향이 어디여서가 아니라, 오뎅이란 단어가 가지고 있는 묘하게 ‘서민적인’ 뉘앙스와 ‘촌스러운 친근함’ 때문이 아닌가 싶다. 생각해 보라. 오뎅보다는 우리말 어묵이 훨씬 고급스럽게 들리지 않는가. 치킨에 밀려난 통닭이 들으면 서운하겠지만 말이다.

재미있는 것은 1940년대부터 오뎅의 순화어로 제시된 꼬치는 이제 거의 쓰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신 언중(言衆)은 촌스러운 오뎅이나, 우아한 어묵이란 말을 쓴다. 음식평론가 황교익 씨의 말처럼 음식 문화에선 책상머리 학자들이 아닌, 먹는 사람이 주체이기 때문이리라. 끝내 표준어로 인정받은 짜장면도 비슷한 경우다. 여기서 우리는 언중에 더해 식중(食衆)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하튼 이제는 한국에서 어묵이 해 온 역할과 사회적 기여를 인정해 줘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문권모 기자 mikem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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