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오후 5시 반경 케냐 나이로비 고로고초 지역. 19세기 종교음악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기독교 성가 ‘생명의 양식’이 석양이 내려앉은 슬럼가에 은은히 퍼졌다. 굶주림,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에이즈), 마약, 범죄 등 슬럼가를 덮고 있는 어둠을 몰아내듯 노래는 장엄하고 힘이 있었다.
한국에 본부를 둔 국제구호단체 굿네이버스(회장 이일하)는 이날 아프리카 최대 빈민가인 이곳에 ‘지라니(현지어로 ‘이웃’) 어린이합창단’을 창단했다.
이곳에서 합창단은 어떤 의미일까. 임태종(56) 굿네이버스 이사는 “어떤 참혹한 환경에도 인간은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고 불러야 한다”고 말했다.
창단하기까지 어려움이 많았다. 양철로 간신히 지붕을 덮은 연습실, 잦은 강도와 도난 등 외적 환경은 그나마 견딜 만했다. 임 이사는 “주민들 사이에 오랜 식민지 경험에서 비롯된, 외국인에 대한 피해의식이 팽배했다”며 “주민들을 설득해 아이들을 보내도록 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1996년 이래 10년간 이 지역에서 직업학교와 어린이교육센터 등을 열어 꾸준히 구호 활동을 해온 굿네이버스의 헌신적 노력에 주민들은 마음의 문을 열었다. 1년여 동안의 준비와 오디션을 통해 올해 10월 마침내 합창단 50명이 꾸려졌다.
이 과정에서 한국인들의 도움과 참여가 잇달았다. 이탈리아 치마로사 국립음악원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음악회만도 200여 회 출연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해온 성악가 김재창(50) 씨가 한국을 떠나 상임지휘자를 맡아 줬다. 울산의 중견 건설업체인 시티종합건설도 1억5000만 원을 쾌척해 힘을 보탰다.
굿네이버스와 김 씨는 이 합창단을 ‘파리나무십자가 소년합창단’처럼 세계적인 합창단으로 키우겠다고 다짐했다.
나이로비=이헌진 기자 mungchi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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