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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명철 기자의 인물기행]박수근을 국민화가로 만든 박명자 갤러리현대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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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명철 기자의 인물기행]박수근을 국민화가로 만든 박명자 갤러리현대 회장

동아일보입력 2010-05-26 03:00수정 2010-05-26 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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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화백께 커피 한잔 못드린게 늘 마음에 걸려요”
갤러리현대 근처의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 ‘국민화가 박수근’전을 알리는 배너들이 걸려 있다. 박수근 45주기를 맞아 열린 이번 전시에는 유료인데도 하루 평균 1000여 명이 몰려들어 성황을 이루고 있다. 이훈구 기자

《생전에 변변한 개인전 한 번 갖지 못했던 화가 박수근(1914∼1965). 박 화백이 오늘날 ‘국민화가’로 자리매김하고, 국내 화가 중 그림 가격이 가장 비싼 이유는 무엇일까. 화가 박수근에 대한 보통 사람들의 ‘속물적 궁금증’을 풀기 위해 갤러리현대 박명자 회장(67)을 만났다. 화상(畵商) 경력 50년인 그는 5차례에 걸친 박수근 전시회를 통해 가난한 무명화가를 ‘국민 화가’로 부각시킨 인물이다. 때마침 서울 종로구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는 ‘국민화가 박수근 45주기 기념전’이 열리고 있다. 30일까지.》― 박수근 화백과의 인연은 언제 시작되었나.

“1961년 현재의 롯데백화점 자리에 있었던 우리나라 최초의 상업화랑인 반도화랑에 취직이 돼 박 화백을 처음으로 만났다. 1965년 5월 작고하실 때까지 5년간 박 화백의 그림을 팔았다. 작고 후 이제까지 5회에 걸쳐 전시회를 열어드렸는데 아마 이번이 제가 해드리는 마지막 전시가 될지도 모르겠다.”

― 정규 미술 교육도 받지 못한 데다 입상 경력도 변변치 않았던 화가에 대해 어떻게 관심을 갖게 됐나.

“전시장에 들어오는 외국인들마다 다른 화가들의 그림은 제쳐 놓고 유독 박 화백의 그림에만 관심을 표시하거나 사가는 것이 신기해 주목을 하게 됐다. 한 달에 2, 3점씩 그의 그림을 팔았다.”

올해로 화상 경력 50년째인 갤러리현대 박명자 회장은 “앞으로 박수근 화백이 한국을 넘어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오르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사진 제공 갤러리현대
― 외국인들이 왜 무명화가인 박수근의 그림을 주목했다고 생각하나.

“화강암처럼 질박한 독특한 마티에르 기법으로 시장의 아낙네들, 어린이, 시골 노인 등 한국적 정서와 인간상을 화폭에 담아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림을 사가는 외국인들이 ‘이 그림은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있는 그림이 아니다. 너무 독특하다. 이거 한 점이면 한국을 기념하고 추억할 수 있겠다’는 얘기들을 많이 했다.”

― 당시 박 화백의 그림은 얼마씩에 거래됐나.


“1962년 정부가 화폐 가치를 10분의 1로 절하하고 단위를 ‘환’에서 ‘원’으로 바꿨을 당시 가격으로 호당 1000원 정도씩에 팔렸다. 2호는 2000원, 3호는 3000원이었다. 그런 작품들이 현재 몇만 배씩 오른 가격으로 가끔 경매에 나온다. 당시 내 월급이 2000원 정도여서 박 화백의 그림을 사두지 못한 것이 아쉽다(웃음).”

― 박 화백의 그림 값이 비싼 것은 ‘희소성’에도 이유가 있다고 들었다.

“1960년대부터 현재까지 각종 전시나 자료를 통해 유화 300여 점이 발견됐고, 이 중 200여 점이 유통된 것으로 추산된다. 작품의 대부분이 해외로 나갔으나 1980년대 이후 국내에서 박 화백의 그림 값이 크게 뛰면서 경매 등을 통해 대부분 국내로 들어오고 있다.”

― 박 화백의 그림을 몇 점이나 갖고 있나.

“믿기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한 점도 갖고 있지 않다. 박 화백은 평소 “‘미스 박’ 시집갈 때 내가 그림 한 점 선물 하겠다”고 하셨다. 하지만 내가 결혼하기 1년 전 박 화백이 돌아가셨다. 그런데 결혼식 때 사모님이 굴비 2마리가 그려진 3호짜리 소품을 들고 오셨다. 감사하면서도 내심 ‘기왕이면 인물화를 한 점 주시지’하고 생각하면서 장롱에 넣어 놓았다가 1970년 2만5000원에 팔아 버렸다. 그런데 박 화백의 그림 값이 해마다 몇십 배, 몇백 배씩 뛰더라.”

하지만 박 회장과 ‘굴비’의 인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자신이 판 가격의 1만 배인 2억5000만 원에 2002년 그림을 되사서 보관해 오다 2004년 박 화백의 고향인 강원 양구에 건립된 ‘박수근 미술관’에 기증했다. 당시 ‘박수근 미술관’에는 유화는 한 점도 없고, 박 화백의 유족이 가지고 있던 수채화 연필 데생, 유품인 안경 등 70여 점만 전시돼 있었다.

― 유가족들이 갖고 있는 그림도 없나.

“딸 인숙, 아들 성남 씨가 화가로 아버지의 뒤를 잇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유작 한 점 갖고 있지 않다. 성남 씨는 생활고로 호주로 건너가 20여 년간 막노동을 하며 그림을 그렸을 정도다.”

― 그림이 팔리는 화가였는데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유는….

“그림을 그리는 데 다 쏟아 부었기 때문이다. 또 수많은 덧칠 끝에 완성되는 그의 독특한 마티에르 화풍으로 인해 그림을 많이 그리지도 못했다. 게다가 박 화백은 직장 없이 그림만 그린 전업 작가였기 때문에 생활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박 화백은 말년에 ‘세월은 빨리 가는데 내 그림은 너무 더디다’고 자탄하곤 했다.”

―뛰어난 화가 중에 괴팍한 사람이 많은데 박 화백의 인품은 어땠나.

“‘나는 인간이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한 자신의 말처럼 착하고 진실한 분이었다. 법 없이도 살 만한 사람이라는 말에 딱 어울리는 분이지 싶다. 어쩌다 그림이 팔려 돈이 생기면 집에 들고 갈 과일을 사면서도 여러 사람한테 나눠 살 정도로 다정다감한 분이었다.”

그는 특히 화가의 고독했던 말년을 회고하며 마음 아파했다. 당시만 해도 너무 어려웠던 시절이라 반도화랑을 운영했던 이대원 화백은 “커피와 카스텔라는 청전 이상범, 구룡산인 김용진 화백 등 두 사람에게만 대접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그래서 박 화백에게는 커피 한 잔도 대접하지 못했다고 한다.

말년에 간경화로 고생하던 박 화백이 반도호텔의 양식 변기를 이용하려고 매일 화랑에 나오곤 했던 것도 가슴아픈 추억이다.

그는 1970년 4월 서울 인사동 사거리에 갤러리현대의 전신인 현대화랑을 개관했고, 그 해 9월 첫 기획전시회로 ‘박수근 유작 소품전’을 열었다. 수채화 및 연필데생 100여 점과 유화 10점이 출품된 전시였다. 이후 박 화백의 작품 세계와 예술 혼은 해가 갈수록 높은 평가를 받게 된다. 1980년 정부는 박 화백에게 은관문화훈장을 추서했고, 그림 값은 천정부지로 치솟기 시작했다. 국내 굴지의 화상으로 성장한 그는 1985년 20주기전, 1995년 30주기 기념전을 개최해 ‘박수근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다. 이때야 비로소 제대로 된 박수근 도록이 만들어졌다. 그는 박수근의 사후(死後) 판화를 만들어 대중화에도 나섰다.

― 이번 45주기 전시에는 ‘절구질 하는 여인’ ‘유동’ ‘골목 안’ ‘나무와 여인’ ‘할아버지와 손자’ 등 박 화백의 주요 작 45점이 전시됐다. 그림을 모으느라 힘이 많이 들었을 것 같다.

“소중히 간직해온 작품을 기꺼이 빌려준 소장가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특히 1960년 작 ‘목련’과 64년 작 ‘아기 업은 소녀’등 몇 점은 처음으로 공개되는 그림이다.”

전시실 한구석에는 박 화백이 자신의 후원자였던 미국인 미술애호가 마거릿 밀러 부인에게 보낸 친필 편지 사본도 전시돼 있다. 한 편지에서 박 화백은 자신이 직접 매긴 그림 값을 밝히고 있다. ‘나무와 행인’(50달러) ‘풍경’(60달러), ‘나무 밑’(60달러) ‘노상’(60달러), ‘귀로’(100달러) 등이다. 당시 50달러는 쌀 서너 가마를 살 수 있는 가격이었다고 한다. 그는 특히 이번 전시를 통해 박 화백의 주요작 99점이 실린 영문 도록(마로니에북스)이 출간된 사실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자신의 뒤를 이어 갤러리현대를 경영하고 있는 아들 도형태 대표(44)가 해외 미술계 인사들로부터 “너희 나라의 최고 화가는 누구냐. 그 화가에 대한 자료를 볼 수 없느냐”고 할 때마다 곤혹스러워 했는데 이제 체면을 살릴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이런 일이야말로 개인 화랑이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 해야 하는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박 화백의 진가도 결국 안목 있는 외국인들에 의해 발견된 것이 아닌가. 작고 50주기 때에는 외국의 유명 미술관에서 큰 규모의 전시를 열어 박 화백이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오르도록 해야 한다.”

오명철 기자osc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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