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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일제 ‘하이난섬 학살사건’ 생존자 여차봉 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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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일제 ‘하이난섬 학살사건’ 생존자 여차봉 옹

입력 2007-04-27 03:02수정 2009-09-27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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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하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위원회가 조사한 자료를 들고 63년 전 중국 하이난 섬에서 일본군이 강제 징용된 조선인 죄수들을 학살했던 상황을 증언하고 있는 여차봉 옹. 인천=이세형 기자

일본군, 거동 힘든 조선인 징용자들 매일 끌고가… 집단 생매장 소문 파다

“하이난 섬은 지옥 그 자체”

“아침 점호를 할 때면 일본 군인들이 막사마다 돌아다니며 거동 못하는 사람들을 끌고 나왔어. 많을 때는 10명 정도씩 막사에서 끌려나왔어. 일본군들은 이 사람들을 트럭에 싣고 어디론가로 갔지. 그렇게 간 사람들 중 다시 돌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어.”

26일 인천 연수구 동춘동에 있는 노인요양시설 영락원에서 만난 ‘하이난 섬 학살 사건’의 생존자인 여차봉(94) 옹은 당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듯 “매일같이 조선인 강제 징용자들에 대한 일본군의 학살이 진행됐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여 옹은 “당시 조선인 징용자들 사이에서는 일본군들이 병에 걸리거나 다쳐서 힘을 쓸 수 없는 조선인을 외진 산으로 끌고 가서 집단 생매장하거나, 죽인 뒤 매장한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덧붙였다.

여 옹은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3, 44년 일제가 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조선인 죄수 2000여 명을 ‘조선보국대’라는 이름으로 강제 징용해서 중국 하이난 섬에서 끌고 가 강제 노역을 시키고 대거 죽인 것으로 알려진 ‘하이난 섬 학살 사건’의 생존자.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진상규명위)’는 최근 여 옹을 하이난 섬 학살 사건의 생존자로 인정했다.

○ ‘천인갱’ 진술한 최초의 생존자

여 옹은 진상규명위가 설립된 뒤 파악한 최초의 하이난 섬 학살 사건 생존자다. 2004년 시민단체인 태평양유족회가 파악한 고복남(90) 옹에 이어 두 번째 생존자다.

그러나 고 옹은 1945년 초여름 일본군의 감시를 피해 인근 중국인 마을로 탈출했다. 또 조선인 학살의 증거로 꼽히는 집단 무덤 천인갱(千人坑)의 실체를 뒷받침해 주는 진술을 하지 않았다.

하이난 섬 학살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진상규명위 맹강현 조사관은 “여 옹은 1945년 10월까지 징용소에 남아 있었고 천인갱에 묻혀진 사람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 묻혔는지를 뒷받침할 수 있는 구체적인 진술을 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맹 조사관은 “2000여 명의 조선인 징용자 중 1200∼1400명이 현지에서 목숨을 잃었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노동력을 상실한 뒤 일본군에 의해 생매장되거나 살해됐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덧붙였다.

현재 진상규명위는 여 옹의 진술을 포함해 하이난 섬 사건과 관련한 종합 보고서를 작성 중이다.

○ 교도소 수감 중 강제 징용돼

여 옹은 1944년 6월 광주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중 일제에 강제 징용됐다. 여 옹에 따르면 당시 7차 동원까지 있었는데 매번 수백 명씩 징용자들이 차출돼 하이난 섬으로 보내졌다.

당시 여 옹을 포함해 11명의 수감자들이 차출됐는데 모두들 안 간다고 하자 교도소 측은 하이난 섬으로 가면 당시 일본 순사의 한 달 월급에 해당되는 30원을 주겠다고 말했다. 그래도 사람들은 거부했는데 결국 강제로 하이난 섬으로 보내졌다. 물론 강제 노역을 하는 동안 돈은 한 푼도 못 받았다.

이들은 발가락이 보이는 신발, 반소매 옷과 반바지로 된 작업복을 받고 부산항을 출발했다.

여 옹은 “부산에서 탄 배는 일본 규슈와 대만을 거쳐 하이난 섬에 도착했는데 20일 정도 걸렸고 조선인 징용자들은 짐짝처럼 배의 맨 아래칸에 실렸다”고 말했다.

당시 이들이 탔던 배에는 조선인 여성 300여 명이 함께 타고 있었다.

여 옹은 “일본인 관리들은 여성들도 하이난 섬으로 가는 노무자라고 했는데 배에 타고 있던 남성 징용자들 사이에서는 일본군위안부라는 소문이 파다했다”며 “하이난 섬에 내린 뒤 여성들은 남성 징용자들과 다른 곳으로 끌려갔다”고 말했다.

○ 죽음의 현장

여 옹은 하이난 섬의 비행장 건설현장에 동원됐다. 당시 생활은 매일 오전 5시 반에 기상해 단체 체조를 하고 오후 9시경까지 일을 했다.

여 옹은 “더운 열대지방에서 한 방에 8명씩 생활했고 음식도 부족하고 형편없어 말라리아에 걸리는 동료가 많았다”고 말했다.

말라리아에 걸렸거나 심한 부상으로 노동을 할 수 없는 징용자들은 매일 아침 어디론가 실려 나갔다.

특히 거동할 수 없는 조선인들을 데리고 가는 일은 일본군들이 직접 담당했고 이들이 어디로 가는지 묻는 조선인들은 일본군에게 심하게 맞았다.

여 옹도 동료 징용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많은 밥을 주려고 일본군 막사에서 밥을 훔쳐 나오다가 발각돼 구타를 심하게 당했다.

여 옹은 “다리뼈와 갈비뼈가 부러져 무척 아팠지만 거동을 못한다는 판정을 받으면 실려갈까봐 필사적으로 움직였다”며 “일본군들도 곧 회복될 것으로 보고 데려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1945년 8월에는 같은 근무지에서 일했던 조선인 노동자 200여 명 중 30명 정도만 살아 있었다”며 “하이난 섬은 지옥 그 자체였다”고 회상했다.

:하이난 섬 학살 사건:

1943년부터 1944년 사이 일본이 중국 최남단의 하이난 섬에 조선인 죄수 2000여 명을 조선보국대란 이름으로 끌고 가 비행장 건설과 항만·철도공사, 철광 채굴 등에 동원했고 이들 중 상당수를 살해했다고 알려진 사건.

인천=이세형 기자 turt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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