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식당 착한 이야기]경남 통영 ‘어촌 싱싱회해물탕’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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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국산해물’ 원칙 지키자 이웃식당들도 살아났다

영업 당일 장을 봐온 싱싱한 뿔소라 가리비 문어 꽃게 전복 등으로 끓여낸 해물탕. 통영=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영업 당일 장을 봐온 싱싱한 뿔소라 가리비 문어 꽃게 전복 등으로 끓여낸 해물탕. 통영=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하나뿐인 아들이 요리사가 되겠다고 했을 때 어머니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교장을 지낸 시아버지, 수협 상무인 남편, 공무원이거나 공기업 직원인 남편 형제들. 집안 분위기로 보면 요리사는 생뚱맞은 직업인 데다 성공 확률도 낮아 보였다.

하지만 아들은 꿈을 접지 않았다. 아버지는 일본 출장길에 선물로 조리용 칼을 사다 주었다. 어머니의 반대 열기는 시간이 갈수록 시들해졌다.

채널A ‘이영돈PD의 먹거리X파일’에서 해물탕 메뉴로 제28호 ‘착한식당’에 선정된 경남 통영시 도천동 ‘어촌 싱싱회해물탕’. 요리사의 꿈을 키워 온 아들 이기호 씨(32)와 이를 반대했던 어머니 정봉선 씨(62)가 운영하는 곳이다.

주말을 맞아 오전 11시 반경 식당을 찾았는데 11개 테이블은 손님들로 꽉 차 있었다. 식당 세 모퉁이에서 에어컨과 선풍기가 열심히 돌아가고 있었지만 열기를 누르지는 못했다. 정 씨는 주방에서 아들이 반쯤 끓여 내놓는 해물탕 냄비를 손님상으로 나르고 있었다. 다른 종업원 2명도 주문을 받느라 비지땀을 흘렸다. 입구에선 “언제쯤 자리가 나느냐”며 줄을 서기 시작했다. “자리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끊임없었다.

오후 2시 반경이 돼서야 빈 테이블이 하나둘씩 생기더니 3시쯤엔 식당이 비었다. 식당 입구에는 ‘오늘 점심 영업은 끝났습니다. 오후 5시 반에 오세요’라는 안내문이 붙었다. 정 씨 모자와 직원들이 식사하고 쉬고 저녁 영업을 준비하는 금쪽같은 시간을 뺏을 수밖에 없었다.
주방 경력 7년으로 얻은 맛집 비결

밀려드는 손님들로 정신없는 어머니 정봉선 씨(왼쪽)와 아들 이기호 씨를 위해조리기능사 자격증이 있는 기자도 이날 가리비 손질을 거들었다. 통영=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밀려드는 손님들로 정신없는 어머니 정봉선 씨(왼쪽)와 아들 이기호 씨를 위해조리기능사 자격증이 있는 기자도 이날 가리비 손질을 거들었다. 통영=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통영에서 고교를 졸업한 이 씨 눈엔 조리학과가 있는 대학만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충남 홍성 청운대 호텔경영조리학과였다. “무조건 서울과 가까운 곳을 찾다 보니 홍성에 가게 됐어요. 교수진도 괜찮다고 해서요.”

통영에서 충남 서부지역에 있는 대학을 가겠다는 아들 생각에 정 씨는 혀를 찼다. “그때는 가슴이 꺼지는 기분이었어요. 뜯어말릴 생각은 아예 하지 못했죠. ‘이제 네 길을 가거라’라고 했어요.”

하지만 이 씨의 대학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현장으로 빨리 뛰어들고 싶은데 학교 수업은 더디기만 했다. 하나뿐인 누나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 데다 부모의 불화까지 겹쳤다. 모두 등지고 싶었다. 그의 선택은 입대였다.

군복무를 마친 뒤에도 고향을 찾고 싶지 않았다. 무작정 서울로 향했다. 주변 모든 게 변해도 요리사가 되겠다는 꿈은 흔들리지 않았다. 식당 일이라면 따지지 않았다. 주방 환경이나 월급, 직원 성향은 고려 사항이 아니었다. 오로지 요리만 할 수 있다면 좋았다.

23세에 서울 이태원동에 있는 한 일식집에 들어갔다. “그릇 닦는 것부터 생선비늘 벗기는 것, 회 뜨는 것 등 안 배운 게 없었어요. 괴팍스러운 고참에게 정강이를 맞기도 했죠.”

고깃집에서도 일해 봤다. 살치, 우둔, 채끝, 토시 등 고기의 특수 부위 명칭을 익히는 것부터 뼈를 바르는 법, 써는 법, 볶고 삶고 육수 내는 법 등 웬만한 것은 다 배웠다.

한곳에 오래 있는 경우는 없었다. 길면 3년, 짧으면 6개월이었다. 새로운 메뉴, 새로운 주방 환경, 새로운 요리사, 새로운 조리법을 찾아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드디어 제대로 된 스승을 만났습니다. 서울 망원동의 골목길 모퉁이 이자카야였어요. 스승은 일본 최대 수산물 시장인 도쿄 쓰키지(築地) 어시장에서 현장 공부까지 하고 온 사람이었어요. 재료의 특성과 배합, 온도 조절과 시간이 왜 중요한가를 차분하게 가르쳐 줬지요. 오후 5시 문을 열기에 앞서 오전 11시부터 6시간 동안 재료를 준비하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7년간의 현장 경험 끝에 이 씨는 작은 결론에 도달했다. 음식 맛의 80%는 신선한 재료가 결정한다는 사실이다. 깨끗하고 신선하고 품질 좋은 제철 재료가 음식 맛을 좌우하고, 이 맛만 낸다면 손님은 찾아오게 돼 있다는 것이었다. 이 씨는 학창시절 늘 봐 왔던 통영 부둣가와 시장 안의 싱싱한 해물들이 생각났다. 인공조미료를 아낌없이 쓰는 식당에서 일하는 것도 염증이 나던 차였다.
해물탕 맛의 절정, 스톱워치로 재 보니

그가 통영으로 돌아온 것은 지난해 5월이다. 어머니 정 씨에게 처음 건넨 말은 “식당을 하고 싶다”였다. “식당 운영이 어디 쉬운 일이더냐?” 오랜만에 돌아온 아들이었지만 정 씨도 할 말은 해야 했다. 결론은 뻔했다. 이번에도 어머니가 졌다.

마침 통영항 여객선터미널과 가까운 곳이자 바다가 보이는 주상복합 1층에 식당 자리가 났다. 7년간 주방에서 일하며 억척같이 모은 돈은 1000만 원. 나머지 4000만 원은 아들의 꿈을 지원해 주던 아버지가 보탰다.

“최상의 재료는 최고의 맛을 낼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항구에서 최상의 재료는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해물 아니겠습니까.”

이 씨는 3대 원칙을 세웠다. 우리 바다의 것, 살아 있는 것, 신토불이 양념만 쓰자는 것이었다. 식당을 차리겠다는 아들을 두고만 볼 일이 아니었다. 평생을 집안에서 고생 모르고 지냈던 어머니도 따라나섰다.

통영에선 조금만 부지런하면 싱싱한 해물 재료를 구할 수 있다. 이 씨는 매일 오전 8시와 오후 3시 반 인근 서호시장과 중앙시장을 직접 돌며 사계절 생산되는 전복과 문어 낙지 가리비 등 조개류와 뿔소라 등을 구입한다. 다만 주꾸미가 나오지 않는 계절에는 문어로 대신한다. 낙지 가격이 껑충 뛰면 손님상에는 큰 문어가 대신 올라온다. 하지만 여름철 금어기에 활게와 새우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게와 새우는 냉동을 쓸 때가 있다.

해물 손질도 만만치 않은 일이다. 가리비의 경우 해저에서 살고 있는 자연산만을 사용하기 때문에 조개껍데기에 온갖 이물질이 끼어 있다. 두툼한 솔로 일일이 씻어 내야 한다. 일일이 냄새도 맡아 봐야 한다. 싱싱하지 않은 게 하나라도 있으면 전체 국물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육수는 지역 특산물인 다시마와 멸치를 사용해 전날 끓여 놓는다. 주문이 들어오자마자 널찍한 냄비에 육수를 넣고 소라, 게, 딱새우를 넣고 끓인다. 끓기 시작하면 대파와 고춧가루 그리고 콩나물, 키조개, 전복, 가리비 순으로 올린다. 익는 순서대로다. 문어는 오래 끓이면 질겨지므로 가장 늦게 올린다.

생물 국산 재료만을 사용한 해물탕 맛은 어떨까. 기자는 해물탕을 먹을 때마다 스톱워치를 사용한다. 끓일수록 깊어 가는 육수의 맛, 그리고 모든 재료가 하나로 어우러져 최고의 맛을 내는 시점이 궁금해서다.

첫 숟가락은 예상했던 대로 맹탕이다. 인공조미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은 데다 각각의 해물 맛이 아직 육수에 배어 있지 않아서다. 가스레인지에 올려 놓은 지 5분쯤 지나자 종업원이 먼저 문어와 전복을 가위로 잘라 먹을 것을 권한다. 고추냉이 간장소스를 사용하지 말고 그냥 먹으란다. 살아 있는 생물이니 해물 본연의 맛을 느끼라는 얘기다.

10분쯤 지나 끓기 시작하자 모든 해물이 하나의 국물 맛을 내기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지며 헌신하는 듯했다. 마치 바다의 오케스트라 같았다. 그야말로 국물 맛이 끝내줬다.

올 4월 방송이 나간 후 이 집엔 길게 줄이 서기 시작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오래 기다릴 수 없는 손님들이 옆 가게를 이용하는 일이 잦아졌다. 주변 상권도 덩달아 살아났다. 가게 이름인 ‘어촌 싱싱회 해물탕’을 본뜬 짝퉁 식당까지 생겼다.

“싱싱한 재료로 건강한 먹을거리를 판매하는 식당이 늘어나면 얼마나 좋습니까. ‘통영 해물탕은 모두 좋더라’라는 말이 나오면 우리도, 우리 지역도 모두 좋아지는 거지요. 손님들은 건강해지고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착한 일을 하는 것 같아요.”(이 씨)

통영=이기진 기자 doyoc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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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물#통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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