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채무… 숫자가 아니라 실력과 신뢰가 문제다[동아광장/하준경]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6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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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자산 부족 시 민간은 저축 마냥 쌓아둬
집단적으로 이루어지면 시장에선 소화 못해
국채 통해 안전자산 제공하고 저축 소화해야
국가채무비율 40% 유지 근거도 실익도 없어
도그마 얽매이지 말고 필요에 따라 활용해야

하준경 객원논설위원·한양대 경제학부 교수
하준경 객원논설위원·한양대 경제학부 교수
정부가 국채를 발행해 나랏빚을 늘린다고 하면 나라 살림이 부실해지는 느낌을 갖게 된다. 반면 정부가 세금을 걷은 만큼 쓰면 건전 재정이라고 말한다. 정말 그럴까.

다음 두 방식을 비교해 보자. 첫째는 지금 쌀을 세금으로 내고 노후에 쌀을 수당으로 받는 방식이다. 둘째는 쌀을 주고 국채를 산 후, 노후에 그 국채를 다시 쌀로 교환받는 방식이다. 정부에 지금 주고 나중에 돌려받음으로써 현재의 쌀을 미래의 쌀로 바꾼다는 면에서는 양자가 비슷한 기능을 수행한다. 또 두 경우 모두 노후에 받을 쌀은 미래 세대가 갓 생산한 것일 테니 후대의 실제 부담도 비슷하다.

그럼 국채와 세금의 본질적 차이는 뭘까. 우선 위험 분담 방식이 다르다. 국채는, 정부가 원리금 지급을 보장하니 상황 변화에 따른 위험을 정부가 일차적으로 부담한다. 반면 세금 활용 사례에선 국민이 느끼는 위험이 더 크다. 나중에 수당이 조정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국채 활용도는 정부의 위험 부담 수준을 보여준다.

한편 국채는 시장에서 쉽게 거래된다는 특징이 있다. 공권력을 가진 정부가 위험을 안고 보증하는 만큼 국채는 안전자산으로 간주된다. 프리미엄이 붙고, 싼 금리에도 잘 팔린다. 나아가 민간이 국채를 선호하고 축적할수록 차환 발행, 신규 발행의 여지도 커진다. 정부의 공권력을 시장에서 자본화해 엄청난 가치를 실현할 수 있다.

이때 정부가 금융시장에서 민간의 기회를 뺏는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들인 벵트 홀름스트룀과 장 티롤의 연구에서처럼 거시적 불확실성이 클 때는 국채라는 안전자산이 기업의 부담을 덜고 금융시장을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안전자산이 부족하면 민간은 ‘낭비적’ 저축, 즉 쌀을 먹지 않고 쌓아두는 일을 하는데 이런 행태가 집단적으로 이뤄지면 쌓인 저축을 금융시장이 소화해내기 버겁다. 따라서 정부가 국채를 적극 활용해 안전자산을 제공하는 대신 쌓이는 쌀을 흡수해 시장을 보완해야 한다.

쌀을 예로 들었지만 우리가 소비하는 재화와 서비스 중엔 쌀보다 내구성이 적은 것이 태반이다. 지금 쓰지 않으면 썩거나 아예 생산되지도 않고 사라지는 것이 많다. 불안감을 해소해 줄 안전자산이 부족하면 ‘과잉 저축-과소 지출’이 발생한다.

지금까지 한국 경제에서 위험은 주로 민간이 떠안았다. 외환위기 이전엔 대기업이 부채를 안고 투자를 늘렸으나 파국을 맞았다. 이후엔 가계가 빚을 떠안았으나 소비에 압박이 가해질 만큼 가계부채가 늘었다.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민간은 흑자, 즉 저축을 원한다. 이때 정부까지 흑자를 원하면 내수가 쪼그라든다. 외국 빚에 의존하지만 않는다면 정부의 적자는 곧 민간의 흑자이고 나랏빚은 곧 민간의 자산이다. 미래 세대는 길게 보면 채권, 채무를 모두 물려받으니 국채가 이들의 부담을 늘리는 원인은 아니다. 오히려 국채는 안전자산이 필요한 이들과 당장 쌀이 필요한 이들의 욕구를 동시에 충족시킴으로써 인구 고령화로 인한 부담을 함께 극복하게 하는 통합의 매개체가 된다.

가만히 있어도 고령화 때문에 수십 년 후엔 북유럽 수준으로 재정 부담이 늘어난다는 말이 2000년대 중반부터 회자됐다. 만약 그때부터 정부가 국채를 과감히 썼더라면 지금 한국은 어땠을까. 사회안전망을 확충하고, 주거비와 사교육비를 줄였다면 가계부채와 저출산 문제가 이렇게 심해지진 않았을 것이다. 고령화는 느려져 미래 세대 부담도 줄었을 것이다. 영국, 프랑스 수준인 한국의 국채 신용도가 일본, 중국 수준에 머물렀을 수는 있겠지만 각자도생으로 내몰리다 빚 때문에 생명을 잃는 사례는 줄었을 것이다.

국가채무비율은 정부의 위험 부담과 이에 따른 사회적 이득의 정도를 보여준다. 40%를 지키자는 주장엔 과학적 근거도 실익도 없다. 국제통화기금(IMF) 보고서는 한국은 240%도 괜찮다고 한다. 정말 중요한 건 위험 관리 능력이다. 정부가 실력이 있고 신뢰를 받으면 일본처럼 200%를 넘겨도 되지만 달러빚을 써야 하면 40%도 위험하다. 한국 관료들의 실력은 어느 선진국 못지않다. 도그마에 얽매이지 말고 경제의 필요에 따라 국채를 적극 활용하기 바란다. ‘빚이 있어야 파이팅 한다’는 말은 약자에겐 가혹하지만 정부엔 기대이고 격려다.

하준경 객원논설위원·한양대 경제학부 교수
#국채#국가채무#한국 경제#국가채무비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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