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우크라 대선 親서방 후보 3인 압축… 푸틴 그림자 ‘어른’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3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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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 크림반도 점령 5주년, 우크라이나는 어디로

페트로 포로셴코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지지자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러시아의 위협과 경제난, 인구 감소, 부정부패 등의 상황에서 치러질 31일 우크라이나 대통령선거에서는 무려 39명의 후보가 난립해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 키예프=AP 뉴시스
페트로 포로셴코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지지자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러시아의 위협과 경제난, 인구 감소, 부정부패 등의 상황에서 치러질 31일 우크라이나 대통령선거에서는 무려 39명의 후보가 난립해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 키예프=AP 뉴시스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이 18일로 5주년을 맞는다. 2014년 2월 러시아군이 크림반도를 무장 점령한 뒤 다음 달인 3월 17일 국민투표를 통한 합병 결의, 하루 뒤 합병조약 서명이 숨 돌릴 틈 없이 진행됐다. 우크라이나와 서방의 반발은 공염불에 불과했다.

5년이 흐른 지금 러시아는 호시탐탐 우크라이나 전체를 넘본다. 지난해 11월 러시아군은 크림반도 인근 케르치 해협을 통과하던 우크라이나 해군 함정을 나포했고, 러시아계 주민이 많은 우크라이나 동부에서는 러시아와의 합병을 외치는 시위가 끊이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우크라이나 상황은 최악이다. 러시아라는 대국(大國)의 위협, 경제난과 인구 감소, 고질적 부정부패, 실종된 리더십 속에 정치적 무질서가 이어졌다. 31일 치러질 대통령선거 1차 투표를 앞두고 무려 39명의 후보가 난립해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 러시아가 사이버 공격 등으로 대선에 개입해 우크라이나의 혼란을 부채질한다는 분석도 있다. 우크라이나 대선은 3파전으로 압축됐지만 누가 당선되더라도 상당 기간 지정학적 긴장이 고조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는 관측이 나온다.


○ 3파전 속에서 선두에 나선 코미디언


우크라이나 대선은 31일 1차 투표 후 과반 득표자가 없을 때 다음 달 21일 1, 2위 후보 간 맞대결로 진행된다. 지지율 상위에 오른 후보는 배우 겸 코미디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41), 페트로 포로셴코 현 대통령(54), 율리야 티모셴코 전 총리(59)다.


가장 눈에 띄는 후보는 공직 및 정당 활동 경험이 전혀 없는 정치 신예 젤렌스키. 1978년 서부 크리비리의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19세 때부터 정치인들을 모사하며 비꼬는 ‘스탠드업 코미디’로 이름을 날렸다. 특히 2015년 평범한 교사가 뇌물을 안 받는 정직한 대통령이 되는 과정을 그린 TV 드라마 ‘인민의 봉사자(Servant of the People)’에서 주인공으로 큰 인기를 끌며 전국적 스타가 됐다. 그는 드라마를 만든 프로덕션과 힘을 합쳐 지난해 3월 드라마 제목과 같은 ‘인민의 봉사자’란 정당을 만들었다. 9개월 후 대선 출마를 선언했고 올 들어 지지율 1위로 올라섰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일이 현실에서 벌어진 셈이다.

우크라이나 여론조사회사 SOCIS가 13일 발표한 여론조사에서 그는 20.7%의 지지율로 포로셴코 대통령(13.2%), 티모셴코 전 총리(11.0%)를 크게 앞섰다. 결선투표에서의 합종연횡 가능성이 높아 당선을 장담할 순 없지만 단순한 일회성 돌풍으로 보기에 어려운 수치다.

우크라이나 국민은 왜 41세 배우에게 열광할까. 가장 큰 이유로 기성 정치 및 부패와 단절된 신선한 이미지가 꼽힌다. 그는 강력한 반(反)부패, 반신흥재벌(올리가르히), 기성 정치권과의 단절을 주창한다. 선거캠프 자원봉사자를 모집할 때도 “정치판에서 활동한 적이 없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을 정도다. 유튜브 등 소셜미디어 활용도 능숙해 정책 홍보와 자원봉사자 모집 등 선거운동의 상당 부분이 온라인으로 이뤄진다. 당연히 젊은층 지지가 높다.


○ 고질적 경제난과 부패

우크라이나의 경제 상황을 지켜보면 ‘젤렌스키 돌풍’의 이유가 이해된다.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병합하고, 동부 분리주의자들과 사실상 내전을 치렀던 2014년 우크라이나의 경제성장률은 ―6.6%를 기록했다. 한 해 뒤에는 ―9.8%까지 떨어졌다. 이후 2016년부터 3년간 2∼3%대의 성장을 기록했고 올해도 2.7% 성장이 예상된다.


문제는 4년 연속 플러스 성장이 상당 부분 ‘기저 효과(base effect)’에 기인했다는 데 있다. 즉, 유례없는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한 2년 때문에 기준이 워낙 낮아져 발생한 플러스 성장일 뿐 절대수치는 아직도 크림반도 병합 전을 회복하지 못했다. 2013년 우크라이나 국내총생산(GDP)은 1833억 달러에 달했지만 2015년 절반 수준인 910억 달러까지 떨어졌다. 2017년에도 1122억 달러에 불과하고 당분간 전쟁 전 수준을 회복하긴 어려워 보인다.

화폐 단위인 흐리브냐 가치도 마찬가지. 역시 2014∼2015년 무려 170%가 하락했다. 이후 안정세를 유지하고 있지만 전쟁 전 수준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계속된 경제난으로 젊은층은 일자리를 찾아 서유럽과 러시아로 떠났고 기업들은 숙련 노동자 부족에 시달린다.

우크라이나 경제를 과점하고 있는 소수 신흥재벌의 부정부패도 심각하다. 지난해 국제 투명성 조사에서 우크라이나는 세계 180개국 중 120위에 그쳤을 정도로 부패가 만연해 있다.

깨끗하고 신선한 후보를 자처하는 젤렌스키조차 부패 문제에선 자유롭지 않다. 최근 현지 언론은 젤렌스키와 유대계 금융재벌 이호르 콜로모이스키(56)의 결탁을 의심하는 보도를 내놓고 있다. 한때 콜로모이스키가 소유했던 우크라이나 최대 은행 프리바트는 경영난으로 2016년 국유화됐다. 콜로모이스키는 아직도 이 은행에 대한 자신의 경영권을 주장하고 있다. 최근 젤렌스키가 콜로모이스키를 두둔하는 듯한 발언을 계속한 데 따른 것이다.


○ 부패에 발목 잡힌 ‘고인 물’ 2인

자국 정계에서 잔뼈가 굵고 국제무대 인지도도 높은 포로셴코 대통령과 티모셴코 전 총리는 모두 부패 이미지에 발목 잡혀 정치 풋내기에게 맥을 못 추고 있다.

포로셴코 대통령은 젊은 시절 초콜릿 원료인 카카오를 파는 회사 로셴을 창업해 ‘초콜릿 왕’으로 불렸다. 자동차, 조선, 방송 등으로 사업을 확장해 2012년 10억 달러(약 1조1100억 원)의 재산을 보유한 세계 1153위 부자가 됐다. 하지만 크림반도 병합 후 우크라이나-러시아 관계가 급랭하고 러시아가 로셴 제품 수입을 금지하자 그의 재산도 빠르게 줄었다. 블룸버그가 추정한 현 재산은 7200만 달러(약 792억 원). 게다가 포로셴코 대통령은 2016년 세계 주요 인사의 역외 탈세를 폭로한 ‘파나마 페이퍼스’에 이름을 올려 공분을 샀다.

우크라이나 국민은 친(親)서방 노선을 주창하고 경제 전문가를 자처했던 그의 경제 성과가 신통치 않다는 데 큰 불만을 나타내고 있다. 그는 5년 전 대선에서 54% 지지율로 1차 투표에서 낙승했다. “로셴을 대기업으로 키운 경험으로 우크라이나 경제도 살려내겠다”는 공약이 먹혔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제는 여전히 좋지 않고 서방과의 사이마저 예전 같지 않다.

국제통화기금(IMF)은 2015년 우크라이나에 175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여러 차례로 나눠 제공하기로 했다. 이후 3년간 4차례에 걸쳐 80억 달러도 지급했다. IMF는 이 돈의 대가로 전기·가스요금 인상, 구조조정 등 경제개혁을 요구했지만 지지율 하락을 우려한 포로셴코 정권은 이를 지키지 않았다. IMF는 잔금 지급을 미뤘고 국민 불만은 더 높아졌다.

2004년 오렌지 혁명(친러 노선을 표방하며 10년간 집권했던 레오니트 쿠치마 전 대통령 체제가 시민 시위로 무너진 사건)을 주도하며 ‘오렌지 공주’로 각광받았던 티모셴코 전 총리도 마찬가지. 그는 이미 2011년 부패 혐의로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약 3년간 복역했다. 두 번째 총리 재직 시절인 2009년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 가스 수입 계약을 맺는 과정에서 직권을 남용해 러시아 측에 유리한 계약을 맺었다는 이유였다. 티모셴코 본인은 당시 대통령이었던 자신의 오랜 정적(政敵) 빅토르 야누코비치의 정치 보복이라고 주장했지만 이미지 타격은 피할 수 없었다.


○ 어른거리는 푸틴의 그림자

세 후보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두 ‘반러시아, 크림반도 회복’을 외친다. 셋 중 누가 집권해도 친서방 정책을 고수할 것이란 의미다. 지난달 우크라이나 국회는 유럽연합(EU) 및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을 헌법에 명문화하는 개헌안까지 통과시켰다. 당연히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극렬하게 반대한다. 러시아가 어떤 식으로든 대선에 개입하지 않겠느냐는 전망이 팽배하다.

서구 정치 전문가들은 특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자국 ‘사이버 전쟁’의 시험소 및 거점으로 쓸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한다. 5월 유럽의회 선거와 내년 미국 대선을 앞두고 우크라이나에 시험적으로 가짜 뉴스를 퍼뜨리거나 사이버 공격을 감행해 두 선거에 개입하려 한다는 의미다. 러시아가 2016년 미국 대선에 개입해 도널드 트럼프 후보 당선을 배후 조종했다는 소위 러시아 스캔들 의혹이 미국 정계를 달구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쉬이 지나칠 수 없는 분석이기도 하다.

영국 정치 전문가인 이언 본드 유럽개혁센터 이사는 “다음 몇 달 동안 우크라이나에 큰 위기가 닥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가 서방에 치우치지 않도록 갖은 수단을 쓸 것”이라며 “대선 과정에서 다양한 선전선동술을 구사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옛 소련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푸틴 대통령에게 크림반도는 좋은 선전 도구이자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전략적 요충지다. 그는 지난해 5월 크림반도와 러시아 남부를 잇는 크림교 개통 행사 날 직접 러시아산 카마스 덤프트럭을 몰고 다리를 건넜다. 로이터는 최근 “푸틴이 크림반도 병합 5주년을 기념해 발전소 2개를 새로 건설해 주는 ‘선물’을 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 강대국의 각축장 크림반도의 역사 ▼

1954년 흐루쇼프가 우크라에 양도… 舊蘇해체 후 영토갈등 격화

동서양의 교차로이자 얼지 않는 부동항을 지닌 크림반도. 러시아인의 오랜 꿈이던 부동항 확보 때문에 이곳은 오랫동안 동서 강대국의 각축장이었다. 그런 과정에서 세계사의 주요 장면을 수놓았고 유명한 인물들을 배출하기도 했다.

중앙아시아 유목민이자 칭기즈칸의 후예를 자처하는 타타르인은 1430년 처음 이곳에 크림칸국이라는 정식 국가를 세웠다. 이후 오스만튀르크의 정복으로 오스만 땅이 됐고 18세기 오스만튀르크와의 전쟁에서 이긴 러시아가 다시 넘겨받았다. 러시아는 1783년 크림반도를 넘겨받자 마자 남부 세바스토폴에 흑해 함대를 창설했다. 러시아 귀족들의 휴양지로도 유명해졌다.

1853∼1856년 러시아와 오스만튀르크는 크림반도를 놓고 다시 격돌한다. 러시아의 남진 정책과 이를 저지하기 위한 유럽 각국의 견제가 맞섰기 때문이다. 이때 ‘백의의 천사’로 유명한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 오스만과 연합했던 영국군 부상병들을 간호했다. 러시아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는 이 전쟁의 패배로 상처 입은 러시아인들을 고양시키기 위해 ‘전쟁과 평화’를 썼다. 당시 오스만이 승리했지만 오스만튀르크의 멸망으로 러시아는 1921년 다시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연방(소련)으로 편입돼 33년간 러시아 내 자치공화국으로 있었다.

크림반도는 한국과도 연관이 깊다. 한반도 분단의 도화선이 된 1945년 2월 얄타 회담이 남부 항구도시 얄타에서 열렸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환심을 사 태평양전쟁에서의 소련 참전을 유도하고 제2차 세계대전을 빨리 끝내려 했다. 그는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유럽, 사할린, 일본 북방영토(쿠릴열도)에서의 소련의 우월적인 권한을 인정했다. 이는 6·25전쟁에도 영향을 미쳤다.


크림반도 영토 분쟁이 본격화한 시기는 1954년. 니키타 흐루쇼프 서기장(사진)이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에 양도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와 인접한 러시아 국경 마을에서 출생한 흐루쇼프는 유년기 우크라이나로 이주했고 사별한 첫 아내와 세 번째 아내 모두 우크라이나인이었다. 정치적으로도 우크라이나 계파의 지지에 힘입어 중앙정계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냈기에 러시아인임에도 우크라이나 사랑이 각별했다. 당시에는 우크라이나와 크림반도 모두 소련 땅이었기에 ‘상징적 이양’에 불과했지만 1991년 소련 해체와 우크라이나 독립으로 본격적인 영토 갈등이 불붙었다.

갈등을 더 깊게 만드는 원인은 크림반도의 인구 구성이다. 현재 인구 230만 명 중 러시아인이 65.3%, 우크라이나인은 15.1%에 불과하다. 특히 인구의 77%는 모어(母語)로 러시아어를 쓴다. 러시아-우크라이나계 주민 갈등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2014년 크림반도 합병 당시 주민투표에서 압도적 찬성이 나왔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게다가 “크림반도의 진짜 소유권은 우리에게 있다”는 타타르인(10.8%)과의 갈등도 존재한다. 소련은 타타르 자치공화국을 만들어 크림반도의 타타르인들을 이주시켰다. 소련 붕괴 후 일부가 되돌아 왔고 이들은 선조가 보유했던 토지에 대한 반환 소송, 이슬람 신앙 등으로 러시아인 및 우크라이나인과 대립하고 있다.

파리=동정민 특파원 ditto@donga.com
#러시아#크림반도 병합#우크라이나 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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