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를 그만 둔다고?”…대만의 워킹맘이 깜짝 놀란 이유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2월 13일 15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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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이콴 씨(34)는 첫째 출산 이후 6개월 만에 복직했다. 최대 2년까지 육아휴직을 쓸 수 있지만 육아와 업무를 병행하기에 어려움이 없는 근무 환경 덕분에 업무에 빨리 복귀할 수 있었다. 타이페이=김철중기자 tnf@donga.com
라이이콴 씨(34)는 첫째 출산 이후 6개월 만에 복직했다. 최대 2년까지 육아휴직을 쓸 수 있지만 육아와 업무를 병행하기에 어려움이 없는 근무 환경 덕분에 업무에 빨리 복귀할 수 있었다. 타이페이=김철중기자 tnf@donga.com
“출산과 육아는 부모가 함께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왜 유독 여성들만 출산과 육아로 ‘경력 단절’을 경험해야 하죠?”

지난해 10월 16일 대만 타이페이시의 부동산중개회사 용칭팡우(永慶房屋)에서 만난 라이이콴 씨(34)의 말이다. 그는 한국 여성들이 출산과 육아로 경력단절을 경험한다는 기자의 얘기에 의아해했다. 라이 씨는 2년 전 첫아이를 출산한 뒤 6개월간 육아휴직을 쓰고 업무에 복귀했다. 그는 “애 키우면서 회사를 다니는 게 쉽지 않지만 육아 때문에 회사를 관둔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 성차별이 거의 없는 나라, 대만


라이 씨는 오전 8시경 아이를 보모 집에 데려다 주고 출근한다. 퇴근 후 오후 6시 반까지 아이를 데리러 가는 일도 주로 그녀의 몫이다. 남편은 직업 특성상 출퇴근 시간이 일정하지 않아서다.

대신 집안일은 남편이 도맡아 한다. 라이 씨는 “설거지나 빨래는 물론, 요리까지 남편이 주로 한다”며 “주말에도 남편이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낸다”고 말했다. 주말 오후 타이페이시 중심가 공원에선 엄마 없이 아빠 혼자 어린 아이를 유모차나 자전거에 태우고 나와 산책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대만 사회는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이 거의 없는 상태다. 라이 씨는 “회사에서도 ‘여성’ 또는 ‘엄마’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일이 드물다”고 말했다. 그녀가 근무하는 부서의 사무직 중 60%가 여성이다. 라이 씨는 “비서로 처음 회사에 들어와 현재 어시스트 매니저로 일하고 있다”며 “영업소 점장은 물론, 사내 고위 간부도 여성 비율이 높다”고 말했다.

대만의 높은 성평등 의식은 각종 수치로 확인된다. 유엔개발계획(UNDP)에 따르면 2015년 기준 주요 아시아 국가의 성불평등지수(GII)는 한국(0.067), 싱가포르(0.068), 일본(0.118) 순이다. GII는 0에 가까울수록 남녀가 평등하다는 의미다. 유엔 회원국이 아닌 대만 정부가 UNDP의 GII 공식을 활용해 자체 조사한 결과 대만의 GII는 0.058로 한국보다 낮았다. 아시아권에서는 성차별이 가장 적은 나라인 셈이다.

직장 내 성평등은 남녀의 낮은 임금격차로 이어지고 있다. 대만의 남성 근로자 대비 여성의 월 평균 임금 격차는 17.0%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14.7%에 근접해 있다. 한국(36.7%)에 비하면 2배 이상 낮은 수준이다. 황링샹 대만 여성인권촉진재단 전문이사는 “1990년대 이후 서비스산업이 급성장하면서 여성 노동력 수요가 크게 늘었다”며 “최근에는 서비스업은 물론, 관리·기술직 등에서도 성별에 따른 직업 장벽이나 차별이 적다”고 설명했다.

● 모성보호에서 시작되는 남녀평등

대만의 신베이시에 있는 리쿠르팅업체 ‘104정보기술’에 근무하는 정자오쥐안 씨(39)는 둘째 출산으로 2년간 육아휴직을 쓴 뒤 지난해 복직했다. 한국에서는 ‘애 낳고 1년 넘게 쉴 거면 그냥 퇴사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며 육아휴직자를 은근 압박하는 회사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정 씨의 사정은 전혀 달랐다.

“복직 2개월 전쯤 회사에서 먼저 연락이 왔어요. 휴직 전 맡은 연구직을 계속 할 수 있는 지 설명해주고, 기존 업무 대신 원하는 보직에 대해서도 친절하게 상담해줬어요.”

가족돌봄휴가 제도도 정 씨처럼 어린 자녀를 둔 워킹맘에게 큰 힘이 된다. 가족돌봄 휴가는 연가와 별도로 1년에 최대 14일까지 가족을 위해 쓰는 무급 휴가다. 얼마 전 정 씨의 첫째아이가 다니는 학교가 내부 사정으로 3일 동안 휴교를 했을 때 정 씨는 돌봄 휴가를 내고 아이를 직접 돌봤다. 그는 “자녀 2명 모두 몸이 약해 번갈아 가며 자주 아픈 편인데, 급할 때마다 하루씩 휴가를 나눠 쓸 수 있어 큰 어려움이 없다”고 말했다.

대만은 조부모나 보모가 가정에서 자녀를 키우는 개인 양육을 선호한다. 하지만 2002년 양성고용평등법을 제정한 이후 기업들이 점차 사내 탁아시설을 늘려가고 있다. 정 씨가 다니는 회사 역시 3년 전 약 4억 원을 들여 본사 건물 안에 보육센터를 마련했다. 0~3세 아동 59명을 돌보는 데 보육교사부터 간호사까지 정식 직원만 15명을 채용할 정도로 보육 여건이 우수한 편이다.
대만의 리쿠르팅 업체 104정보기술㈜의 보육센터. 아이를 맡긴 직원들은 센터 옆 휴게 공간에서 아이들과 함께 점심을 먹기도 한다. 신베이=김철중기자 tnf@donga.com
대만의 리쿠르팅 업체 104정보기술㈜의 보육센터. 아이를 맡긴 직원들은 센터 옆 휴게 공간에서 아이들과 함께 점심을 먹기도 한다. 신베이=김철중기자 tnf@donga.com

104정보기술 부총괄 매니저인 웨버 정 씨는 “평균 1~2년이던 육아휴직 기간이 보육센터를 운영한 뒤로 6개월~1년으로 줄었다”며 “휴직 기간이 짧아지면서 인력 운용에 숨통이 틔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 회사의 여성 직원 출산율은 대만 전체의 2배에 달한다”고 귀띔했다.

다만 대만에서도 대기업이 아닌 중소기업의 경우 탁아시설과 같은 모성보호 시설이 많이 부족한 게 현실이다. 또 20, 30대 여성의 경력단절이 문제인 한국과 달리 대만은 30대부터 여성의 경제활동비율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 황링샹 전문이사는 “성평등 인식 수준에 비해 공공 육아에 대한 인프라나 투자가 여전히 부족하다”며 “대만은 세금 징수율이 높지 않아 북유럽의 복지 시스템을 따라가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밝혔다.
▼대만의 다양한 성평등 관련 제도 살펴보니…▼

1987년 대만 국부기념관의 여성 안내원 57명은 직장을 그만둬야 했다. 30세가 넘었거나 결혼을 했거나 혹은 임신을 해서다. 이곳 안내원들은 중국 전통의상인 ‘치파오’를 입고 일했다. 기념관 측은 안내원들의 몸매가 망가지는 걸 막기 위해 ‘임신 및 결혼 방지’ 규정을 계약서에 넣었다. 이때 해고된 여성들이 차별적인 제도에 맞서 단체행동에 나선 것이 대만에서 직장 내 성평등 관련법이 만들어진 시작점이다.

대만의 양성고용평등법은 안내원 해고 사건이 일어난 지 15년 만인 2002년에 만들어졌다. 한국에서 남녀고용평등법이 1987년에 제정된 것에 비하면 10년 이상 늦었지만, 한국보다 빨리 제도가 기업이나 업무 현장에 뿌리 내렸다. 왕야펜 대만 노동부 양성평등과 전문위원은 “도입 초기부터 벌칙 규정을 명문화하고 휴직 시 임금 보전 방안 등 여성을 위한 실질적인 지원을 고민했다”고 말했다.

대만은 출산휴가와 육아휴직 이외에도 유산·임신·산전검사 등 모성보호와 관련된 다양한 휴가 제도가 있다. 회사의 경제적 부담을 고려해 휴가 종류와 기간별로 유급과 무급이 구분돼 있다. 배우자 출산휴가의 경우 한국과 대만 모두 2002년에 도입했지만 한국에서는 2007년에야 의무 규정이 생겼다. 대만은 도입 당시부터 유급 휴가로 의무화했다.

처벌 조항에서도 대만 정부의 실천 의지를 읽을 수 있다. 대만은 출산휴가나 육아휴직 등 양성고용평등법에서 규정한 모성보호 제도를 위반한 기업에 1200만 원 이하의 벌금을 물린다. 위반한 사업장에 대해서는 사업주와 회사명, 책임자 성명까지 공개한다. 정해진 기간 안에 개선하지 않으면 누적 처벌이 이뤄진다.

근로자가 제도를 부담 없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한 점도 눈에 띈다. 대만의 0~3세 자녀가 있는 근로자라면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 제도를 쓸 수 있다. 업무시간이 줄어든 만큼 급여도 줄지만 원하는 기간동안 1시간씩 늦게 출근하거나 일찍 퇴근할 수 있다.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을 정착시키기 위한 정부 지원도 활발하다. 대만 정부는 2014년부터 ‘워라밸 우수 기업’을 시상하고 있다. 휴가나 탄력근무 제도, 가족친화 정책, 직원건강 프로그램 등이 평가 대상이다. 기업이 가족친화 행사를 하고자 하면 정부는 프로그램별로 최대 700만 원까지 보조금을 준다.

타이페이·신베이=김철중기자 tnf@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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