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함께 ‘북한의 유관순’ 윤택진-동풍신 기리자”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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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3·1운동 100년/2020 동아일보 100년]
천안시, 정부에 공동추모 제안
황해도 재령 시위 윤택진 열사 ‘기억하는가, 윤의사’ 본보도 알려
함북 명천 만세운동 동풍신 열사 서대문형무소서 고문 받다 순국

윤택진 열사 27주기 추도식을 알린 동아일보 1947년 4월 17일자 2면 기사.
윤택진 열사 27주기 추도식을 알린 동아일보 1947년 4월 17일자 2면 기사.
‘해방의 기쁨도 못 보고 이슬로 사라진 투사들이 많거니와 여기에 다시 우리의 가슴을 새삼스레 흔들어 놓은 소년 열사….’

3·1운동동아일보 1947년 4월 17일자 ‘기억하는가 애국소년의 순충(殉忠) 소년 소녀여 따르라 윤의사(尹義士)에’ 제하의 기사 일부다. 여기서 윤 의사는 윤봉길 의사가 아니다. ‘북한판 유관순’으로 알려진 윤택진(尹澤振·1904∼1920)을 말한다. 이 기사는 그 전날인 16일 서울 기독청년회관에서 열린 윤택진 27주기 추념식을 소개하고 있다.

북한에도 유관순 열사처럼 1919년 만세운동을 이끈 소년 소녀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남과 북이 갈라지면서 대중에게는 잊혀졌다. 그러나 유관순 열사의 고장인 충남 천안시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이들을 기억 속에서 불러냈다.

구본영 천안시장은 9일 천안시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3·1운동 100주년 남북공동기념사업으로 유관순 열사와 황해도 재령의 윤택진, 함경북도 명천의 동풍신(董豊信·1904∼1921)을 남과 북이 같이 기리자고 정부에 제안했다.

천안시 관계자는 “다음 주 통일부에 공동 추모 제안서를 제출한다. 사전협의 단계에서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다”고 전했다.

윤택진과 동풍신은 독립유공자로 지정돼 있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은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열린 지난해 3·1절 경축사에서 “열일곱 꽃다운 나이의 동풍신 열사는 함경북도 명천 만세시위에 참여했고 이곳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다”면서 그를 같은 곳에서 순국한 유관순 열사와 동렬에 놓았다.

동풍신을 유관순 열사와 같은 반열에 놓을 수 있는지에 대해선 이견도 있다. 류정우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장은 “공동 추모 제안에 기본적으로는 찬성한다”며 “하지만 동풍신은 사료가 부족한 데다 유관순 열사의 비폭력 정신과는 달리 폭력(방화)에 연루됐다고 지적하는 시각도 있다”고 말했다.

이날 천안시는 천안 출신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주석과 의정원 의장을 각각 네 차례, 세 차례 역임한 석오 이동녕 선생 동상을 천안시에 세우고 국회의사당에 있는 선생의 흉상을 전신상으로 바꾸어 줄 것도 정부에 건의하기로 했다.

구 시장은 “미국 뉴욕 주의회가 14일 ‘유관순의 날(3월 1일)’ 제정결의안을 통과시키면 3월 1일 뉴욕시청 앞에서 뉴욕주 한인회 교포 200명이 ‘유관순 만세 재현’ 행사를 열 예정”이라며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 200벌, 태극기, 영정 등을 지원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윤택진 열사: 오산학교 2학년이던 1919년 3월 1일 황해도 재령군 남율면 해창리 교회당에 모인 수백 명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읽은 후 만세를 선창하고 시위 행렬을 이끌었다. 두 달가량 도피생활을 하다 붙잡혀 평양헌병대로 이송됐다. 가혹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다른 동지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1920년 4월 16일 옥에서 순국했다. 정부는 201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동풍신 열사: 1919년 3월 15일 함경북도 명천군 하가면 화대동 일대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아버지가 일경의 총격으로 숨지자 시신을 끌어안고 통곡하다 다시 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위대가 이 모습에 고무돼 다시 만세를 불렀고 이어 면사무소 등을 불 질렀다.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을 받았지만 기개를 굽히지 않다 순국했다. 1983년 대통령 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천안=지명훈 기자 mhjee@donga.com
#3·1운동#공동추모#유관순 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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