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가방 사고 유럽 여행…‘파이세대’가 소비에 몰입하는 이유는?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1월 28일 17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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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무원 김지인 씨(34)는 몇 해 전 ‘1년에 명품 브랜드 가방 하나씩 사기, 유럽 여행 다녀오기’를 인생의 버킷리스트로 정했다. 매년 연봉에 3분의 1에 가까운 금액을 쓰지만 김씨는 어차피 연애도 결혼도 하지 않을 생각이라 그만큼 소비하는 것에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2. 대기업 입사 1년차인 김성훈 씨(가명·28)도 월급의 30% 이상을 옷이나 신발 등을 구매하는 데 쓰고 있다. 나머지 70%는 식사나 레저 비용으로 지출한다. 적금이나 예·적금 등 저축으로 나가는 돈은 ‘1도’ 없다. 보험가입도 하지 않았다. 김 씨는 “취업준비생 때 힘들 때 고생한 나에 대한 보상 심리”라며 “나이 들면 바뀔지 모르지만 당분간은 이런 기조를 유지 하겠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파이세대’를 대표한다. 불확실한 미래를 준비하기보다 확실한 지금의 행복을 위해 소비하는 20, 30대 젊은층이다. 파이세대가 과감히 소비한 덕분에 경기침체 속에서도 명품시장과 백화점, 여행산업, 수입차시장은 의외의 호황을 맞고 있다.

● 큰 손 ‘파이세대’

지금의 중장년층은 취업을 하면 결혼자금이나 자녀양육비, 내집마련을 위해 저축하는 걸 당연시 했다. 하지만 ‘파이세대’는 달랐다.

28일 본보가 롯데, 현대, 신세계, 갤러리아 등 국내 주요 백화점의 해외 명품 브랜드 매출 실적을 분석한 결과 20대의 매출 신장률은 30.2%, 30대는 15.7%였다. 반면 40대는 12.8%, 50대는 15.3%에 그쳤다. 그동안 해외 명품시장은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40, 50대가 주도했지만 이제는 매출의 절반 정도를 20, 30대가 차지한다. 최근 몇 년 동안 20, 30대의 비중은 점점 커지고 있다.

KB국민카드가 세대별 월 평균 카드 이용액을 분석한 결과, 올해(1~9월) 20, 30대 1인당 월 평균 카드 이용액은 55만9807원으로 연 평균 15.3% 증가했다. 같은 기간 60년대 생 ‘386세대’(7.5%)와 70년대 생 ‘X세대’(9.3%)의 증가율보다 확연히 높았다.

● 포기에서 비롯된 소비


파이세대가 이처럼 소비에 몰입할 수 있는 원천은 연애, 결혼, 출산에 이어 집을 포기한 데서 나온다. 특히 최근 몇 년 새 미친 듯이 오른 집값으로 파이세대가 월급 모아 내 집을 마련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됐다. 회사원 최도연 씨(33)는 2014년 결혼 후 지난해 서울 성북구 성북동 전용면적 69㎡(옛 20평형 대) 빌라로 이사하며 전셋집 인테리어에 7000만 원 가량을 썼다. 최 씨는 “내 집은 아니지만 살고 있는 동안만큼은 ‘내가 살고 싶은 집’으로 꾸미고 싶었다”고 말했다. 최 씨처럼 전월세집을 꾸미는 수요가 늘자 인테리어시장 규모는 지난해 30조 원에 이어 2020년엔 40조 원 가까이 성장할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파이세대는 미래의 소득을 잠시 당겨쓴다는 생각에 대출에도 거부감이 없는 편이다. 은행원 김용우 씨(31)는 수입차(아우디)를 거의 대출로 샀다. 최근엔 스위스로 휴가를 가서 250만 원을 쓰고 왔다. 김씨가 차와 휴가에 빚을 내서 큰 돈을 쓰는 이유는 단 한 가지다. “30대의 5일은 60대의 5일보다 더 가치 있는 시간이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회사원 김승연 씨(29)씨는 부모님께 여행비 500만 원을 빌려서 2016년에는 아이슬란드와 영국으로 열흘간 여행을 다녀왔다. 지난해 가을에는 미국을, 올 여름에는 다이빙 자격증을 따러 세부를 갔다 왔다. 올 연말 미국 뉴욕행 항공권도 일찌감치 끊어놓았다. 김씨는 “연애를 하지 않다보니 시간과 돈이 남는 편이라 여행에 투자하고 있다”고 말했다. 해외여행을 위해 대출을 받는 수요가 늘며 최근 하나투어에서는 여행비를 신용 할부로 결제하고 여행을 떠나는 대부 상품을 처음 출시하기도 했다.

● 부모보다 가난한 첫 세대

기성세대가 보기에 파이세대의 큰 씀씀이는 ‘건강하지 못한 소비’로 보인다. 취업은 어려운데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고 당장의 행복만 추구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파이세대가 나름대로 똑똑한 소비를 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책 ‘요즘 것들’의 저자이자 기업 컨설턴트인 허두영 씨는 “20, 30대 젊은 세대들은 지금 집을 사려면 한 푼도 안 쓰고 20~30년 동안 모아도 서울에 집을 살 수 없을 거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세대”라며 “불가능한 소유보다 지금 당장 누릴 수 있는 경험에 방점을 둔, 현실적인 소비를 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제일기획 자회사인 펑타이코리아의 최원준 소장은 파이세대를 ‘부모세대보다 부유하지 못한 첫 세대’라고 정의하며 이들의 양면성에 주목했다. 취직이 어렵고 직업의 안정성이 떨어지다 보니 모을 때는 악착같이 모으지만, 남과는 다른 소비와 취미를 위해 과감한 ‘탕진잼’을 즐긴다는 것이다. 최 소장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인생샷을 남기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독특한 취향을 드러낼 수 있는 과시용 체험에 아낌없이 투자하는 것”이라고 봤다.

염희진기자 salthj@donga.com
손가인기자 ga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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