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걸크러시]〈4〉양백화 “내 남편은 내가 찾겠어”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0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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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일생은 남편에게 달려 있으니, 시집을 잘못 가면 원망이 매우 클 것입니다. 큰길가에 높은 누각 한 채를 지어 주시면…. 두목지(杜牧之)같이 잘생기고, 이태백(李太白)같이 문장을 잘 지으며, 왕희지(王羲之)같이 글씨 잘 쓰고, 정자산(鄭子産)같이 지혜로워, 훗날 높은 관직에 오를 남자를 선택하겠습니다.”―고전소설 ‘해당향’에서

이 당돌한 여인은 누구인가? 19세기 고전소설 ‘해당향’의 등장인물인 양백화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직접 남편감을 고르겠다고 선언한다. 미관말직의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지내면서 수많은 청혼을 뿌리친 것도 모자라 이런 황당한 말까지 했다. 대부분 양반집 규수라면 부모님이 정해주는 대로 결혼하는 게 당연했다. 또 남편 될 사람의 얼굴 한 번 못 보다가 첫날밤 처음 보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양백화는 달랐다. 스스로 배우자를 찾겠다고 밝혔을 뿐만 아니라 남편감을 직접 보고 판단하겠다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말을 내뱉는다.

조선시대 3대 이상 급제자를 배출하지 못한 가문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또 부유한 집안이라도 여성의 사회 진출은 봉쇄돼 있었다. 양백화의 집안 역시 영릉 최고의 부자였지만 출세길이 막힌 양반 가문이었다. 그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공식적인 역할을 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뛰어난 남편을 만나 가문을 번성시키겠다는 그의 포부는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어머니 역시 남달랐다. 양백화의 당돌한 생각에 동의했을 뿐만 아니라 남편감을 고르기에 최적화된 누각을 지어줬다. 큰길가를 내려다볼 수 있도록 누각을 높게 짓고 침실과 연결되는 복도를 만들어 마음대로 관찰할 수 있게 해줬다. 그는 1년여 동안 수많은 행인을 살펴봤다. 마침내 이상형에 딱 맞는 남편감을 발견한다.

양백화는 불특정 다수의 남자를 관찰하고 분석해 비슷한 가문끼리 결혼하는 기존 패턴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남편 선택의 첫째 기준은 외모로, 미남이어야 했다. 둘째는 능력이었다. 호방하고 남성미 넘치는 영웅호걸보다는 지혜롭고 현명한 문인관료를 원했다. 꽃미남에 시를 잘 짓고 붓글씨까지 잘 쓰는 남자! 그야말로 ‘이상형’이라 할 수 있는 완벽한 남성상을 드디어 찾았다. 바로 유곤옥이었다. 그는 도적 떼를 만나 어머니와 헤어진 뒤 떠돌던 참이었다.

이상형을 찾은 양백화는 더 과감하게 행동한다. 누각 창문으로 귀걸이 한 쌍을 던져 징표를 전달한 후 자신의 아름다운 얼굴을 일부러 노출했다. 그러고는 유곤옥의 숙소를 수소문해 집으로 초대했다. 여자는 가만히 규방에 앉아서 남자가 택해주기를 기다리는 보수적인 결혼관을 깨버렸다. 그런데 유곤옥에게는 결혼을 약속한 여자가 있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변변치 못한 남자를 만나 일생을 망치느니 정실부인이 되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기준에 맞는 훌륭한 남자와 부부의 연을 맺고 싶었다. 양백화의 바람대로 유곤옥은 과거에 장원급제해 입신양명의 길을 걷는다. 그녀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양백화는 남편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세우고 어머니를 설득해 굳은 의지로 결혼식까지 밀어붙였다. 배우자를 스스로 선택하고 남성을 대신해 집안을 일으킨 주체적인 여성으로 거듭났다.
 
이후남 전주대 강사·국문학 박사
#양백화#해당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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