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부형권]‘루저 트럼프’의 한반도 악몽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6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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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형권 국제부장
부형권 국제부장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12일)을 기록한 북한 조선중앙TV의 42분짜리 동영상을 흥미롭게 봤다. 여자 아나운서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만나는 장면 하나하나를 격정적인 목소리로 전달했다.

“두 나라의 최고 수뇌들이 이렇게 만나 화해를 향한 큰 걸음을 내딛고, 대화의 장에 마주 서게 될 줄, 그 누가 상상할 수 있었겠습니까.”

맞다. 상상할 수 없었다. 김 위원장도 “세계 많은 사람들이 공상과학(SF) 영화 속 판타지를 본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말했다지 않은가. 기자의 눈엔 트럼프 대통령이 김 위원장에게 전용 리무진 내부를 보여주는 장면이 동영상의 하이라이트였다.

“미합중국 대통령은 최고 영도자 동지께 ‘야수(비스트)’라 불린다는 자기의 전용차를 직접 보여드리며 최고 영도자 동지에 대한 특례적인 존경과 호의의 감정을 표시했습니다.”

단 한 번의 만남으로, 세계 최강국의 72세 지도자가 국제사회 제재를 받는 ‘불량 국가’의 34세 독재자에게 ‘특례적 존경’을 보낸 셈이 됐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 TV 여성 앵커가 (항상 김정은을 칭송하듯 나를 칭송할 수 있게) 미 언론에 취직해야 한다”고 김 위원장에게 말했다고 한다. 뼈 있는 농담 같다. 트럼프 대통령은 늘 칭송에 목말라 있기 때문이다. 백악관은 “미국과 남북한이 성취한 위대한 승리”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축하 말씀, 공화당 인사들의 찬사 등을 홈페이지에 잔뜩 올려놨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래도 성이 안 차는지 17일 트위터에 이런 글도 올렸다. “북한과의 비핵화 협상은 전 아시아에서 찬사와 축하를 받고 있다. (그런데) 여기 미국 내 몇몇 사람은 이 역사적 협상을 트럼프의 승리가 아닌, 실패로 본다.”

영미의 주류 언론과 한반도 전문가들은 위너(winner·승리자)로 김정은과 ‘손 안 대고 코 푼’ 중국을 많이 꼽는다. 자연스럽게 루저(loser·패배자)는 트럼프 대통령이란 얘기다. 미국 유권자들의 평가도 아직 후하지 않다. 한 여론조사 결과 ‘이번 회담으로 핵전쟁 위험이 낮아졌다’(39%)와 ‘변한 건 없다’(37%)는 의견이 비슷했다. ‘모르겠다’도 24%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고는 못 사는 인생’을 살아왔다. 그의 열혈 지지자이자 사실상 대변인 역할까지 하는 뉴트 깅리치 전 하원의장(75)은 “트럼프에 대해 꼭 기억해야 할 사실은 ‘그는 늘 승리해 왔다’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대선 슬로건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도 ‘미국은 중국 등 많은 나라에 지고 있다. 미국을 다시 승리하는 나라로 만들겠다’라는 의미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에 한미 연합 군사훈련 중단을 결정하고, 주한미군 철수까지 운운하며 “그동안 미국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갔다”고 했다. 비핵화 비용을 거론할 때마다 “미국이 돈 낼 일은 없다”고 한다. “비핵화 대화가 실패하면 한미 연합 훈련을 바로 재개할 수 있다”고도 했다. ‘한반도 게임에서 손해 보는 루저는 결코 되지 않겠다’는 사전 포석 같다.

11월 미국 중간선거가 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비핵화 마감 시간’을 트럼프 대통령의 첫 임기가 끝나는 2020년으로 못 박았다.

그의 중간선거 승리와 재선 성공을 트럼프 지지자들보다 남북한이 더 열심히 응원해야 하는, SF 영화 같은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겠다. ‘루저 트럼프’는 한반도 평화의 꿈을 언제 어떤 식으로 긴장의 악몽으로 뒤바꿀지 알 수 없으니까 말이다.
 
부형권 국제부장 bookum90@donga.com
#북미 정상회담#도널드 트럼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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