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박훈상]어린이, 노인, 시장 상인… ‘3종 세트’에 속지 말자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6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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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훈상 정치부 기자
박훈상 정치부 기자
“예쁘게 웃지 않는 어린이는 돌려보내세요. 새로 찍읍시다.”

과거 지방선거 광역단체장 선거에 출마했던 A 후보는 선거공보물에 쓸 사진을 찍기 위해 섭외한 어린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옆에 세우고 찍으면 사진이 잘 나올 것 같지 않았다. 어린이를 달래서 더 잘 찍어볼 생각도 없었다. A 후보의 말을 들은 사진사는 대충 몇 장을 찍는 척하다 어린이를 보내야 했다. 다른 어린이를 섭외해 후보와 나란히 사진을 찍었고, 그 사진 덕분인지 그해 선거에서 A 후보는 당선됐다고 한다.

선거공보물을 만드는 선거기획사 B 대표가 들려준 얘기다. B 대표는 “후보는 사진으로 유권자를 속인다. ‘기획 촬영’의 결과물로 후보를 고르면 안 된다”고 말했다. 특히 인지도가 낮은 기초단위 선거 출마자들이 사진으로 승부를 보는 경향이 더 강하다고 했다.

B 대표와 만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6·13지방선거를 앞두고 기자가 사는 아파트에도 2일 선거공보물이 배달됐다. 선거공보물 사진만 보면 다들 그럴싸했다. 손자뻘 어린이에게 다정하게 책을 읽어주고, 병원에 입원한 노인의 손을 잡으며 위로를 건네는 모습도 있었다.

하지만 B 대표의 얘기를 떠올린 뒤 사진을 다시 보게 됐다. 진정성을 의심하게 됐다. B 대표에 따르면 선거 출마 후보들은 ‘야외 촬영 3종 세트’를 찍는다고 한다. 어린이와 노인, 시장 상인이다. 여기에 상습 교통 정체 구역이나 개발지구에서 찍는 사진을 추가한다. 개발지구에선 흰색 헬멧을 쓰고 설계도를 들고 관계자에게 보고를 받는 포즈도 정해져 있다. 모범 사례처럼 선거공보물 3종 세트에 더해 개발지구 현장 사진을 담은 기초의원 선거공보물도 있었다.

3종 세트를 하루에 몰아서 찍다 보니 유치원과 노인정, 시장을 급히 돌아야 한다. 이러니 사진 속 이미지와 달리 어린이와 노인, 시장 상인에게 무엇이 필요하고 뭐가 불편한지 물어볼 여유는 별로 없다. 게다가 여기 등장하는 ‘병풍 인물’들은 대부분 사전에 섭외된다. 어느 기초의원 후보는 노인과 장애인을 정말 ‘병풍’ 삼은 건지 그들과 악수하며 눈은 카메라만 바라보고 있다.

30여 종의 선거공보물을 다시 넘겨보면서 텍스트에 집중했다. 사진은 속일 수 있어도 후보자 정보공개 자료를 속일 순 없다는 다른 선거 전문가의 말이 떠올랐다. 이번 선거에 출마한 후보 중 한 명은 정직한 인상을 주는 얼굴 사진과 함께 교통안전 정책을 주요 공약으로 내걸었다. 그런데 그 후보의 전과 기록을 보니 도로교통법 위반 기록들이 담겨 있다. 그중에는 음주운전 기록도 있었다. 선거공보물 속 환상에 속았다간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가 짊어지게 된다. 이번 선거부터 사진보단 내용을 보고 투표하자.
 
박훈상 정치부 기자 tigermask@donga.com
#6·13 지방선거#선거공보물#기획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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