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세상/홍형진]직장 생활이 다 그렇지, 뭐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5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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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형진 소설가
홍형진 소설가
정말이지 이건 마법 주문과도 같다. 사회 곳곳의 다양하고 복잡한 부조리가 제목의 한 문장으로 뭉뚱그려지기 때문이다. 3년 전 ‘땅콩회항’ 사건의 피해자인 박창진 대한항공 사무장이 언론과 가진 인터뷰를 보니 이를 더욱 확신하게 된다. 일반 승무원으로 강등된 그가 그동안의 외로운 투쟁에 대해 털어놓았는데 난 특히 두 대목에 눈길이 간다. 첫째는 동료 직원들의 따돌림이다. 노조는 그를 외면했고 일부 직원 또한 그를 음해하고 모함했다고 한다. 박 씨는 그들이 자발적으로 복종하며 자신을 ‘관종(관심 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큰 사람을 비꼬는 말)’ 취급한다고 안타까워했다. 둘째는 변호사들의 외면이다. 소송을 위해 국내 30대 로펌을 찾았지만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더 큰 고객인 대한항공에 밉보일 수 없어서.

이 따돌림과 외면은 모두 직장 생활의 이름으로 이뤄진 것이다. 대한항공, 유명 로펌이라는 간판을 내려놓은 개인으로서의 그들은 박 씨가 불합리한 사유로 고초를 겪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평소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통해 여러 현안에 비판적이고 곧은 목소리를 개진하는 사람도 적지 않을 테다. 하지만 자신의 생계와 커리어가 걸린 조직의 일원으로서의 그들은 좀체 그런 마음을 내비치지 못한다. 침묵하고 외면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며 때로는 조직의 기강을 해치고 이미지를 실추시켰다며 도리어 비판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우리가 직장에서 일상적으로 겪는 일이다.

프리랜서로 살아가는 우리 글쟁이도 어느 정도는 그렇다. 세상만사에 참견하기를 즐기는 작가가 막상 자기 분야에서 추문이 일면 입을 닫는다든가, 작품의 비평을 청탁받은 평론가가 기획사나 매체와의 관계를 해치지 않으려고 실제 감상보다 우호적으로 쓴다든가, 여론을 선도하는 칼럼니스트가 매체의 정치 성향에 맞춰 주제와 소재를 고른다든가 하는 건 딱히 새삼스러울 것 없는 풍경이다. 어쩌면 온전한 프리랜서는 없을지도 모른다.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 나도 마찬가지다.

지인과 자리를 가지면 가끔 회사 ‘욕 배틀’이 벌어진다. 다들 자기 회사, 자기 처우, 자기 상사, 자기 고객사가 더 별로라고 불평을 늘어놓는다. 하지만 결론은 똑같다. 이리저리 까놓고 보니 비슷하다는 걸 깨닫고 ‘직장 생활이 다 그렇지, 뭐’라면서 일축하는 것이다. 직장 생활이라는 네 글자 안에는 부조리, 인내 등이 은근슬쩍 숨어 있다. 회사에서 겪은 부당함을 가족이나 친구에게 토로했다가 위로도 면박도 아닌 이런 대답을 들은 경험이 다들 몇 번은 있지 않나. 계속 듣다 보면 결국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게 되고 언제부턴가는 타인에게 똑같이 말하며 대물림하는 데 일조한다.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보통 사람이어서다.

대한항공 직원 500여 명이 광화문에서 촛불을 들었다. 보통 사람들의 반란이다. 한데 가면을 썼다. 현실의 직장 생활을 고려해 스스로를 지키며 목소리를 낸 것이다. 의미를 유추하면 ‘직장 생활이 다 그렇긴 한데 그렇다고 꼭 그래야만 하는 건 아니잖아?’ 정도가 되지 않을까? 그들에게 피해가 없길 바란다.
 
홍형진 소설가
#땅콩회항 사건#박창진 대한항공 사무장#직장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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