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떡밥만 뿌리고 가는 낚시꾼은 없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2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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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오전 강원 동해시 묵호항 연안여객선터미널에 정박한 만경봉92호에서 북한 삼지연 관현악단 등 예술단원들이 하선하고 있다. 동해=사진공동취재단
7일 오전 강원 동해시 묵호항 연안여객선터미널에 정박한 만경봉92호에서 북한 삼지연 관현악단 등 예술단원들이 하선하고 있다. 동해=사진공동취재단
주성하 기자
주성하 기자
1996년 11월 26일 연평도로 북한 병사 정광선이 탄 목선이 표류해 왔다. 한국 경비정에 구조된 그는 조사 뒤 북으로 돌아갔다. 얼마 뒤 노동신문은 그를 ‘혁명전사의 귀감’이라며 한 개 면을 털어 크게 내세웠다. “괴뢰 놈들이 배를 끌고 가려 할 때 도끼를 휘두르며 정신 잃을 때까지 싸웠고, 집요한 귀순 회유에도 장군님 품으로 가겠다는 절개를 굽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19세 정광선은 말단 상등병에서 바로 장교로 진급했고, 죽기 전엔 받기 어렵다는 최고의 명예인 공화국영웅까지 됐다. 함북 청진의 그의 모교는 ‘정광선고등중학교’로 개명됐다.

그로부터 3년쯤 뒤 정광선이 술자리에서 “남조선을 암흑의 세상이라고 배웠는데, 서울에 가보니 완전히 불바다더라”라고 했고, 이를 전해 들은 김정일이 “앞으로 남조선을 암흑의 세상이라 교육하지 말라”고 했다는 말을 북에 있을 때 들었다. 실제로 이후 북한 대남 교육은 “한강 다리 아래 거지가 득실댄다”는 레퍼토리에서 “부익부 빈익빈이 극심해 살기 힘든 사회”로 바뀌었다.

남쪽에 살던 한 탈북자는 2012년 북으로 돌아가 기자회견까지 하고도 반년 뒤 다시 탈북했다. 남조선에서 먹었던 삼겹살과 삼계탕 이야기를 했다가 보위부에 잡혀가 고문을 받았고, 숨 막혀 살 수 없어 다시 도망쳤다는 것이다. 집중 감시를 받는 줄 뻔히 알면서도 술이 들어가니 입을 통제 못 한 것이다. 진실은 자루 속 송곳과 같다.


북한이 평창 겨울올림픽을 활용해 체제 선전 공세를 펼 것을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게 통할 것이라고 믿는다면 우리 국민을 우습게 본 것이다. 일부러 눈과 귀를 틀어막은 극소수를 빼곤 북한이 어떤 곳인지 다 안다. 오히려 북한이 체제 선전을 한다면 엄청난 역풍을 받을 게 뻔하다. 북한 예술단이 싫은 사람들이 진짜로 걱정해야 하는 것은 북한 여성들이 체제 선전 가요가 아닌, 한국 노래를 심금을 울릴 정도로 너무 감동적으로 부르는 상황이 아닐까 싶다.

따져보면 역대 최대 규모로 500여 명이나 남쪽에 내려보낸 북한이야말로 엄청난 용기를 낸 것이다. 아무리 입단속을 하고 감시를 해도 그들이 북으로 돌아간 뒤 언제 어디에서 어떤 말을 할지 알 수가 없다. 최소한 가족 형제에게는 비밀이 없다.

북한이 동포애를 발휘해 남쪽 잔치가 흥하라고 위험을 감수하며 대규모 대표단을 보낸 것이 아님은 누구나 안다. 북한이 올림픽 이후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를 재개해 남북 관계가 지난해 수준으로 돌아간다 해도, 올림픽 기간 북한 도발을 관리해 평화적으로 대회를 치른 한국의 득이 더 크다. 그걸 북한이 모를 리가 없다.

김정은이 신년사에서 평창에 간다고 했을 때는 이미 올림픽을 활용해 분위기를 바꾼 뒤 어떻게 하겠다는 구상은 서 있었을 것이다. 그걸 위해 동생 김여정까지 포함된 대규모 남한 방문단이란 떡밥을 던진 것이다.

북한은 무엇을 노리고 있을까. 떡밥의 양과 질을 봤을 때 개성공단이나 금강산 관광 재개 정도로 만족할 것 같진 않다. 또 미국의 동의 없이 그게 가능하지 않다는 것도 잘 알 것이다. 북한의 모사(謀士)들을 우습게 보면 안 된다. 더구나 북은 목을 내놓고 결재받는 곳이다.

하지만 핵이나 ICBM을 내걸지 않고 미국을 움직일 순 없다. 안 될 것도 없다. 원료 추출 시간이 오래 걸리는 핵무기보단 기술을 이미 확보해 수십 개를 얼마든지 다시 만들 수 있는 ICBM은 얼마든지 흥정판에 올려놓을 수 있다. 사실 북한은 미국까지 가는 ICBM을 굳이 가질 필요는 없다. 미국 영토에 쏴봐야 자살 행위이고, 가진 것만으로도 미국의 분노만 키울 뿐이다. 협박용 핵미사일은 주한미군만 사거리에 넣어도 충분하다.

북한도 지금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적잖게 파악했을 것이다. 말을 얼마나 쉽게 바꾸고, 자화자찬은 얼마나 능숙하게 하는지 등을 말이다. 남한을 활용해 북-미 대화를 성사시킨 뒤 “김정은을 압박해 미국을 핵 공격 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아 냈다”는 업적을 트럼프에게 만들어준다면 흥정할 수 있다고 계산했을지도 모른다.

ICBM 포기와 함께 미국에 “신뢰를 지키면 핵무기도 폐기하겠다”는 약속도 못 할 것은 없다. 그렇게 목을 조이는 대북제재를 풀어내고, 경제협력을 하자며 남한 돈을 다시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시간도 벌고 잇속도 챙길 수 있다. ICBM은 필요할 때 미국이 약속을 깼다며 다시 만들면 그만이다. 북한은 늘 임기 내 업적에 안달인 한미 대통령들을 봉으로 활용하는 데 능숙했다. 이미 한국 정부는 “말씀만 하십시오” 자세라고 여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평창 올림픽 이후의 대북카드는 걱정할 필요도, 급해할 필요도 없다. 고위급 대표단이나 다른 라인을 통해서 북한이 먼저 낚싯대를 던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들이 낚으려는 게 잉어인지 가물치인지 판단하면 된다. 세상에 떡밥만 뿌리고 가는 낚시꾼은 없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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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광선#평창 겨울올림픽#김정은#도널드 트럼프#대북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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