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평인 칼럼]언론, 여론, 재판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8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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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BI 수사내용은 불순물 많아 미국 언론은 그대로 안 써

최순실 특검, 피의사실 흘려 뇌물죄 유죄 여론 형성했으나 ‘차고 넘친다’고 자부한 증거 공판에서 대부분 논박당해

재판부, 법리로만 판결해야

송평인 논설위원
송평인 논설위원
밥 우드워드가 쓴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이라는 책을 보면 그가 1970년대 닉슨의 워터게이트 도청 사건을 파헤칠 당시 미국 언론의 취재윤리를 엿볼 수 있다. 기자들은 연방수사국(FBI)의 수사기록을 알아내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면서도 수사기록을 ‘정화(淨化)되지 않은 보고서’로 간주했다. 우드워드는 “FBI에서는 누구라도 악의적인 말을 할 수 있고 (소환된 사람이 전하는) 정확도가 떨어지는 정보, 개인적 의혹, 불평불만이 그대로 기록된다”고 썼다. 그래서 우드워드의 워싱턴포스트는 범죄로 보이는 내용은 두 명 이상의 취재원에 의해 확인되지 않는 한 수사기록만으로 보도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갖고 있었다. 우드워드는 제보자인 ‘딥 스로트’로부터 받은 정보도 힘든 확인 작업을 거친 후에야 기사화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는 사정이 다르다. 수사기록 내용 자체가 그대로 특종이 된다. 이런 약점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집단이 검찰이고, 그것을 가장 잘 이용한 것이 최순실 국정농단 특검이다. 특검법에는 ‘국민의 알 권리 보장을 위해 피의사실 외의 수사 과정에 대해 브리핑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다. 이 규정은 피의사실을 제외하고 있지만 실제론 특검이 피의사실을 매일 흘리는 수단으로 악용됐다. 그렇게 해서 특검의 프레임에 맞춘 부정확한 정보가 많이 보도됐고, 그에 따라 편향성이 강한 여론이 형성됐다.


특검은 박근혜 전 대통령과 기업 총수들을 뇌물죄로 기필코 기소해야 하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국회가 박 전 대통령 탄핵 사유에 수사도 되지 않은 뇌물죄를 입도선매 식으로 끼워 넣는 바람에 사후적으로 뇌물죄를 입증해야 했던 것이다. 탄핵을 위해서는 굳이 뇌물죄까지 필요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이 뇌물죄를 뭉개버리고 파면을 선고한 헌법재판소의 결정에서 드러났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면 뇌물죄가 필요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국회와 헌재가 맡은 탄핵 절차의 외곽에서 흔히 공직자의 가장 중요한 탄핵 사유로 취급하는 뇌물죄의 피의사실을 지속적으로 흘림으로써 탄핵에 대한 압력을 증가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검이 흘린 정보만 일방적으로 들어야 했던 수사 단계에서와는 달리 피의자와 변호인의 주장까지 들을 수 있는 공판 단계에서는 정보의 균형이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했다. 특검이 ‘차고 넘친다’고 자부하던 증거는 결심(結審) 단계에 이르러서는 상당 부분 논박당했다. 막판에 청와대까지 나서 이른바 ‘캐비닛 문건’을 공개하며 지원사격에 나선 것은 만약 뇌물죄가 무죄가 되면 곤란해지는 측이 어딘가 불안해한다는 인상을 줬다.

특검을 빼놓고는 이제 미르·K스포츠재단에 간 돈을 뇌물이라고 보는 쪽은 별로 없다. 양아치에게 돈을 뜯기는 것은 무슨 대가를 바라서가 아니라 해코지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다. 이제 초점은 삼성의 최순실 딸 정유라 승마 지원금도 뜯긴 돈이냐, 아니면 뇌물이냐로 모아진다. 이것은 삼성이 승마협회 지원사 자격으로 지원한 것이어서 이쪽에서 보면 이렇게, 저쪽에서 보면 저렇게 보인다. 뭐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결국 대가 부분을 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특검이 대가로 설정한 삼성의 승계 작업이라는 틀은 외양만 그럴듯할 뿐 실체는 부실하다. 삼성 측은 “특검이 주장한 ‘승계 작업’ 과정이 모두 마무리되더라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삼성전자에 대한 의결권에는 아무런 변동이 없다”고 딱 잘라 주장했다. 변동이 있는지 없는지는 판사가 계산기를 두드려 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언론계의 교황으로 불린 월터 리프먼은 일찍이 ‘여론’이란 책에서 여론 자체가 아니라 여론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주목할 것을 촉구하고 여론이 얼마나 비합리적으로도 형성될 수 있는지 강조했다. 여론은 존중해야 하지만 형성 과정이 왜곡된 여론까지 존중할 필요는 없다. 뇌물죄 사건을 처음부터 관심을 갖고 지켜본 한 대형 로펌의 대표변호사는 “특검은 여론에 호소해 왔고 재판부가 여론의 압박을 이겨낼 수 있느냐가 유무죄의 관건”이라고 말했다. 권력에 저항하는 것보다 여론에 맞서는 것이 더 어려운 시대라고 한다. 그럼에도 판사라면 여론에서 독립해 유죄든 무죄든 오로지 명징한 법적 논증으로 판결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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