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권택 영화감독 “저런 저질 영화 누가 찍었나 했는데… 알고보니 내 작품”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2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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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뚜기와 함께 하는 오뚜기 인생]

“난 정말 운이 좋았다. 마지막까지 영화를 찍으며 시네마천국에서 놀다 가겠다”고 말하는 임권택 감독. 그의 102번째 작품 ‘화장’이 내년 초 개봉을 앞두고 있다. 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난 정말 운이 좋았다. 마지막까지 영화를 찍으며 시네마천국에서 놀다 가겠다”고 말하는 임권택 감독. 그의 102번째 작품 ‘화장’이 내년 초 개봉을 앞두고 있다. 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임권택 영화감독(80)은 눈이 맑다. 순하다. 송아지의 눈처럼 따뜻하고 슬프다. 그는 평생 묵묵히 영화만 찍고 살았다. 영화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 취미도 없다. 놀 줄도 모른다. 노래도 음치에 ‘박(자)치’다.

임 감독은 언젠가 판소리가 너무 좋아 한 대목 배우려고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사흘 만에 포기했다. 첫 대목부터 엉뚱하고 괴상한 소리가 나왔다. 아무리 연습해도 마찬가지. 당시 영화를 찍고 있던 배우 김명곤(62·전 문화관광부장관)에게 배웠는데, 그도 결국 ‘감독님, 도저히 안 되겠습니다’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렇다. 임권택은 그런 사람이다. 어쩌다가 시간이 나도 그의 머릿속은 온통 영화 생각뿐이다. 어디 가서 좋은 경치를 봐도 영화에 담을 생각만 한다. 책도 영화에 관련된 것만 잔뜩 쌓아놓고 파고 또 판다. 부인 채령 씨(63) 말마따나 ‘정말 재미가 하나도 없는 사람’이다.

“1954년 이래 영화판에서만 살았다. 오직 먹고살기 위해 아등바등했다. 1962년 감독으로 데뷔할 때도 적잖이 망설였다. 당시엔 한번 흥행에 실패하면 그 감독은 아무도 불러주지 않았다. 그냥 조감독으로 사는 게 낫지, 만약 망친다면 당장 밥줄이 끊길 판이었다. 게다가 난 거의 무학(無學)에다가 빨갱이집안이었다. 한번 밀려나면 끝이었다. 난 운이 좋았다. 데뷔작 ‘두만강아 잘 있거라’가 대박이 났다. 그렇다고 그 이후부터 봐주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감독 벌이라는 게 한편 찍어 그런대로 성공하면 그 다음 편 찍을 때까지 먹고 살만큼 딱 그 정도였다. 그러니 끊임없이 찍을 수밖에. 영화가 좋을 리 없었다. 애초부터 난 자신을 자격미달이라고 여겼기에 ‘대단한 작품’ 같은 건 꿈도 꾸지 않았다. 할리우드영화 흉내를 많이 냈다. 걔네들 삼류나 아류 정도만이라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그것도 가당치 않았다. 제작비나 촬영장비, 배우, 시나리오 수준으로 보면 어림 반 푼어치도 없었다. 그렇게 10여 년 동안 50여 편을 찍었다. 지금도 그때 영화를 보면 부끄럽다. 어느 방송인터뷰에서 ‘불태우고 싶다’고 했는데 사실이다. 솔직히 모두 없어졌으면 좋겠다. 언젠가 우연히 TV에서 60년대 영화가 방영되는 걸 봤는데, 참 저질이었다. 처음엔 ‘어느 놈이 찍었을까’ 했는데 알고 보니 내 작품이었다. 낯이 뜨거워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임권택은 7남매(3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향은 전남 장성. 아버지를 비롯한 삼촌 등이 모두 좌익이었다. 한밤중 툭하면 형사들이 구둣발로 안방까지 들어와 벽장과 이불까지 들쳐댔다. 혹시나 아버지가 산에서 내려왔나 해서였다. 그때마다 온 집안이 쑥대밭이 됐다.

결국 임권택은 집을 뛰쳐나왔다. 1951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노동자의 삶을 시작했다. 벌면 먹고, 못 벌면 며칠이고 굶었다. 잠은 거리에서 해결했다. 그는 노숙자들 사이에서 술꾼 겸 이야기꾼으로 통했다. 그들에게 날마다 삼국지, 수호지, 통속소설 같은 것을 ‘연속방송’식으로 들려줬다. 광주 숭일중학교 때 미친 듯이 온갖 책을 빌려본 덕분이었다.

술은 유일한 친구였다. 낙동강 막소주를 김치나 소금을 안주로 끝없이 마셔댔다. 돈이 없어 취할 때까지 못 마시는 게 한이었다. 그때 수전증을 얻었다. 그리고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휴전 이듬해, 난 부산에서 군화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같이 일하던 이북상인들이 ‘영화가 돈이 된다’며 그걸 제작하러 서울로 함께 가자고 했다. 이것저것 허드렛일을 도와달라는 거였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어디서든 밥만 먹을 수 있다면 좋았다. 그렇게 영화판에 발을 들여놓았다. 정말 열심히 일했다. 식당에 출연진들 밥도 시켜주고, 조명 일이든 소품 일이든 닥치는 대로 해치웠다. 결코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하다보니 점점 일에 재미가 붙었다. 어느 날, 정창화 감독(86)이 나에게 연출 일을 시키기 시작했다. 그 유명한 ‘톱 여배우 뺨 때린 사건’도 바로 그 무렵에 터졌다. 촬영 중인 여배우가 갑자기 못 찍겠다며 분장실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설득해도 소용없었다. 막내인 내가 나섰다. 그래도 끄떡하지 않았다. 난 그만 화가 나서 그 여배우 뺨을 때려버렸다. 촬영장은 난리가 났다. 영화를 못 찍으면 그때까지 들어간 비용이 몽땅 날아갈 판이었다. 결국 여배우가 내세운 조건대로, 내가 무릎 꿇고 그 여배우로부터 뺨 석 대를 맞았다. 내가 뺨을 때릴 때 분장실 밖에서 키득키득 웃었던 제작부장도 그렇게 석 대 맞았다. ‘개 같은 × ’이라고 욕을 퍼부었던 남자배우는 방안을 엉금엉금 돌며 ‘개’처럼 컹컹 짖었다. 그렇게 그 영화는 다시 촬영할 수 있었다. 그 도도했던 여배우는 지금 미국에서 잘살고 있다고 들었다.”

임권택은 1973년 내놓은 영화 ‘잡초’를 제2의 데뷔작이라고 여긴다. 그때부터 슬슬 자신의 색깔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사실 임 감독은 ‘그래도 난 전쟁 통에 살아남아 영화라도 만들고 있잖은가’라는 걸 위안으로 삼았다. ‘이 정도면 됐지, 뭐!’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밑바닥에는 부채감이랄까, 허무감이랄까 하는 것도 있었다. 고은 시인이 ‘미안하다/미안하다/나 같은 게 살아서 오일장장터에서 국밥을 다 사먹는다’고 노래한 것처럼….

“어느 날 내 자신을 돌이켜보니 대충 사는 게 체질화돼 버렸다. 내 인생을 휴지처럼 쓰고 있었다.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뻥치는 영화 그만 만들고 싶었다. 우리 삶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것들을 만들어서 어쩌자는 건가. 하지만 그게 쉽지 않았다. 이미 뼛속까지 스며들어서 그 물을 빼는 데 딱 10년이 걸렸다. 사실 1990년 ‘장군의 아들’도 깡패영화라서 안 만들겠다고 했다. 나도 모르게 옛날 그런 저질영화를 만들까봐 엄청 걱정이 됐다. 그래서 ‘전원 신인배우를 쓰는 조건’으로 찍었다. 그렇게 하면 신선해지지 않을까 해서였다. 고생 많았다. 배우를 공모했는데 나중에 촬영하면서 보니 실제 주먹들도 뽑혔다. 할 수 없었다. 그런 친구들은 격투하는 장면에만 써먹었다. 결과적으로 ‘장군의 아들’ 흥행성공으로 ‘서편제’를 찍을 수 있었다. 제작자에게 ‘절대 흥행은 안 되겠지만 우리 것 한번 해보고 싶다’고 했더니 흔쾌히 허락했다. 난생처음 마음을 비우고 편안하게 만들었다. 여주인공 오정해는 우연히 TV를 켰다가 미스춘향선발대회에 나온 그녀를 보았다. 전형적인 조선여인의 얼굴이었다. 주저 없이 선택했다. 그렇다. 난 영화판에서 놀지 않으면 금단현상이 생긴다. 내년 초엔 102번째 영화 ‘화장’을 개봉한다. 주연배우 안성기 씨와는 8번째 만남이다. 시사회는 고향 장성에서 할 예정이다. 고맙게도 올봄 장성군에서 호숫가에 ‘임권택시네마테크’도 만들어줬다. 1998년 문을 연 동서대 임권택영화예술대학에도 정성을 쏟아야 한다. 물론 영화 찍는 일은 계속한다. 마지막까지 시네마천국에서 놀다가 갈 것이다. 난 정말 운이 좋았다.”
▼ 스물여덟에 ‘마흔다섯 임 감독’과 결혼한 여배우 채령 ▼

“영화밖에 모르는 재미없는 남편이지만 결혼 후회한적 한번도 없어”


1979년 열일곱 살 아래 신부 채령과의 결혼식.
1979년 열일곱 살 아래 신부 채령과의 결혼식.
1979년 임권택은 마흔다섯 늦깎이에 결혼식을 올렸다. 신부는 스물여덟의 꽃다운 여배우 채령. 무려 열일곱 살 차이가 났다. 누가 봐도 고개를 갸웃거릴 만했다. 신부집안에서야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임권택이 처음 인사드리러 간 날, 장인은 아무 말 없이 휑∼ 밖으로 나가버렸다. 분위기가 얼음장처럼 싸늘했다. 장모는 ‘말도 안 된다’며 망연자실했다.

두 사람의 만남은 무술영화 ‘요검(1971)’ 덕분이었다. 채령은 당시 MBC탤런트 3기 출신으로 초대 오란씨 모델로 활동하고 있었다. 아직 연기가 뭔지도 모르는 햇병아리였다. 임 감독은 신인 여배우를 찾다가 채령에게 출연을 제의했다. 채령은 매몰차게 거절했다. 시나리오에 ‘야한 장면’이 있다는 이유였다. 결국 임 감독이 ‘노출신을 찍지 않겠다’고 하자 합류했다.

“속을 어지간히도 썩였다. 전북고창 선운사에서 한 달쯤 찍었는데, 첫날부터 묵을 방이 마음에 안 든다며 억지를 부렸다. 고참 여배우들도 가만히 있는데, 참 어이가 없었다. 그렇다고 내칠 수도 없어 내 방을 내줬다. 그 후에도 툭하면 ‘그만 찍고 서울로 올라가겠다’며 성깔을 부렸다. 연기라도 잘하면 이해하겠는데, 나 원 참…. 어떻게 하겠는가. 이미 촬영은 시작됐고, 그저 어르고 달래고, 연기지도를 해가며, 끌고 가는 수밖에. 한번은 (채령)부모님이 촬영현장에 찾아오셨는데, 눈에 걱정이 가득했다. 난 ‘감독인 내가 책임지겠다’며 안심시켜드렸다. 후에 내가 진짜로 그녀 인생을 책임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채령이라고 할 말이 없는 건 아니다. 당시엔 그저 임 감독이 하늘같고, 무섭기만 했다. 하기야 열아홉 풋내기 아가씨가 뭘 알았겠는가. 모든 게 낯설고 어설펐다. 영화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었다. 스토리가 어찌 돌아가는지, 클로즈업이 뭔지…. 그래서 영화 찍다가 ‘도저히 못하겠다’고 하면, ‘여태까지 찍은 비용 다 물어내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그때마다 덜컥덜컥 겁이 났다.

임권택은 영화를 찍고 난 후 채령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충무로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났다. 그땐 채령이 무뚝뚝한 임 감독을 더욱 살갑게 반겼다. 그렇게 두 사람은 8년 동안 남몰래 사랑을 키웠다. 하지만 임 감독은 늘 찜찜했다. ‘내가 지금 이 젊은 아가씨한테 죄를 짓고 있는 건 아닌가’ ‘만약 이 아가씨에게 결혼 상대가 생기면 그땐 헤어져야 되는 거 아닌가’ 이런저런 생각들이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하지만 채령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콘크리트처럼 단단해져 가족 설득에 나섰다. 다음은 채령의 이야기.

“난 어머니에게 말했다. ‘만약 이 사람하고 결혼시켜주면 평생 후회하지 않고 살겠다. 부모님 힘들게 하지도 하겠다. 하지만 날 다른 사람과 결혼시킨다면 난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당돌했다. 그 어린 나이에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워낙 딸이 강하게 나오니까 부모님도 어쩔 수 없이 허락해 주셨다. 그 후 난 정말 단 한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물론 부모님 힘들게 하지도 않았다. 부모님도 우리 부부에게 굉장히 잘해주셨다. 큰소리 한번 치지 않으셨다.”

임 감독 집은 영화인 가족이다. 두 아들도 대학 영화과를 졸업했다. 큰아들 임동준(34)은 광고회사에 다니고 있고, 둘째아들 권현상(33·임동재)은 영화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권현상은 임 감독의 101번째 영화 ‘달빛 길어올리기’에 단역(한지 장인 아들)으로 출연했다. 역시 부인 채령 씨도 달빛 길어올리기 촬영현장에 갔다가 ‘등 떠밀려 엉겁결에’ 공방 주인역할을 맡았다.

“둘째가 연기자의 길을 간다기에 ‘난 널 도와줄 수 없다. 아비 덕 볼 생각 눈곱만큼도 하지 말라’고 했다. 그랬더니 ‘저도 그럴 생각 전혀 없다’며 이름부터 바꾸더라. 그건 좋은 데, 성까지 바꿔서 내심 적잖이 서운했다. 자기 말로는 내 이름 중 ‘권’자를 택했다고 하지만…. 그러다가 문득 애가 가능성이 있는지 한번 보고 싶었다. 슬쩍 지나가는 말로 ‘달빛…’에 한번 출연해 볼 의향이 없느냐고 떠봤다.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허허허. 형이 ‘아버지가 아니라 감독으로 생각하라’며 설득하지 않았으면 콧방귀도 뀌지 않았을 것이다. 아들의 연기수준? 글쎄, 그 길은 끝이 없는 것 아닌가.”
임 감독은 영화 말고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 하지만 촬영 현장에만 서면 신바람이 난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 선글라스맨이 임 감독. 임권택 감독 제공
임 감독은 영화 말고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 하지만 촬영 현장에만 서면 신바람이 난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 선글라스맨이 임 감독. 임권택 감독 제공
임권택 감독 약력

▽1934년 11월 2일(음력) 전남 장성 출생 ▽1962년 영화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데뷔 ▽한국영화연구소 초대이사장(1996) ▽동국대 연극영상학부 겸임교수(1998) ▽영화진흥위원회위원(1999) ▽대한민국예술원회원(2002∼) ▽동서대 임권택영화예술대학 석좌교수(2008∼)

▼작품 ▽잡초(1973) ▽왕십리(1976) ▽족보(1979) ▽만다라(1981) ▽길소뜸(1986) ▽티켓(1986) ▽씨받이(1987) ▽아다다(1987) ▽연산일기(1988) ▽아제아제바라아제(1989) ▽장군의 아들(1990) ▽개벽(1991) ▽서편제(1993) ▽태백산맥(1994) ▽축제(1996) ▽춘향뎐(2000) ▽취화선(2002) ▽하류인생(2004) ▽천년학(100번째 영화·2007) ▽달빛 길어올리기(2010) ▽화장(개봉 예정·2015)

♣국내상
▽대종상 감독상(1973, 79, 1981, 86, 87, 88, 1993) ▽백상예술대상 예술상(1976, 78, 1981, 82, 83) ▽한국영화평론가협회 감독상(1986) ▽백상예술대상 작품상(1986) ▽청룡영화상 감독상(1991, 96, 2002) ▽청룡영화상 대상(1993) ▽백상예술대상 감독상(1996, 97, 2000) ▽춘사대상영화제 감독상(1991, 93) ▽춘사영화예술인상(1995) ▽춘사탄생100주년 기념공로상(2002) ▽올해를 빛낸 한국인상(2002) ▽호암상 예술상(2003) ▽만해대상(2004)

♠국제상 ▽아시아영화제 감독상(1974) ▽아시아태평양영화제 감독상(1987) ▽상하이영화제 감독상(1993) ▽일본후쿠오카아시아문화상(1997) ▽샌프란시스코영화제 구로자와상(1998) ▽부산영화제 아시아영화진흥기구상(2000) ▽하와이영화제 최우수작품상(2000) ▽아시아태평양영화제 특별상(2000) ▽칸영화제 감독상(2002) ▽베를린영화제 명예황금곰상(2005, 07) ▽두바이영화제 평생공로상(2007) ▽마라케시영화제 골드스타상(2009)

★훈장
▽보관문화훈장(1989) ▽프랑스 문예공로훈장 슈발리에(1991) ▽금관문화훈장(2002) ▽유네스코 펠리니 황금메달(2002)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훈장 슈발리에(2007)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임권택#임권택 감독#오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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