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기습한 김신조, “박정희 목 따러 왔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5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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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19>북한의 도발

1968년 1월 21일 무장공비로 청와대를 기습하려다 생포된 김신조(가운데)가 사살된 공비들의 신원을 확인하고 있다. 동아일보DB
1968년 1월 21일 무장공비로 청와대를 기습하려다 생포된 김신조(가운데)가 사살된 공비들의 신원을 확인하고 있다. 동아일보DB
1968년 1월 21일이었다.

폐결핵에 걸린 김지하가 입원해 있던 서울 은평구 역촌동 시립병원 안이 벌집 쑤신 듯 시끄러워졌다. 총검을 든 군인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 북(北)에서 게릴라가 침투했다며 병원 안을 이 잡듯이 뒤지고 다녔다. 총소리가 북한산과 불광동 쪽, 구파발 쪽에서 계속 들려왔다.

1월 23일자 각 신문 1면에는 ‘서울에 무장간첩단’이라는 제목으로 사살당한 무장공비와 무기들이 대문짝만 하게 실렸다. 그중에는 생포당한 ‘게릴라’ 김신조가 기자회견한 기사도 있었다. 김지하는 병원에서 그것을 읽었다. 다음은 조선일보 1면에 보도된 문답 중 일부이다.

―성명과 나이는?

“김신조, 이십칠세입니다.”

―소속과 계급은?

“조선인민군 제124군 부대 소위입니다.”

―이번 임무는?

“박정희의 ×××(모가지라는 뜻)를 따고 수하간부들을 총살하는 것입니다.”

―성공할 줄 알았는가?

“실패는 생각지도 않았고 만약의 경우 죽음을 각오했습니다.”

―자하문에서 충돌하기 전까지 군경 수색대를 보았나?

“아무도 만나지 못했고 간첩작전을 벌이고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막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김지하는 “김신조의 말이 마치 사람 같지 않은 기계나 인조인간이 내뱉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기억한다.

1960, 70년대 박정희 정부가 중앙정보부나 보안사령부 등을 중심으로 반공(反共)을 민주화 세력을 탄압하는 독재의 도구로 자주 활용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정권의 의도와 관계없이 당시 북한의 위협은 엄연히 존재했다. 북한의 도발은 1960년대 후반부터 부쩍 심해졌다.

게다가 1960년대까지만 해도 공업화 측면에서나 국민소득 면에서 남한은 북한보다 훨씬 뒤졌기 때문에 북한의 도발은 국민들에게 실체적 공포였다. 남북 간 경제격차는 일제강점기 때부터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어서 남한으로서는 단숨에 북한 경제를 따라잡기가 쉽지 않았다.

통일연구원의 ‘남북한 경제력 비교연구’에 따르면 1964년만 해도 북한의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194달러였지만 남한은 107달러였다. 군사력도 북한의 절반 수준이었다. 남한의 경제력이 북한과 거의 대등한 수준으로 된 것은 10월 유신이 있던 1972년에 이르러서였다. 그해 남북한의 1인당 GNP가 316달러로 같아진 것을 시작으로 74년에 이르러서야 남 535달러, 북 461달러로 남한이 북한을 앞지른다.

1960년대만 해도 남한보다 잘살던 북한은 남한보다 앞선 경제력 군사력을 바탕으로 각종 도발과 대남 선전공세를 계속했다. 박 대통령으로서는 안으로는 경제개발을 위해 박차를 가해야 했고 밖으로는 북한과 힘든 싸움을 벌여야 했다. 그런 점에서 68년은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해다. 새해 벽두부터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북한의 도발이 잇달아 터졌기 때문이다. 1·21사태와 푸에블로호 납치 사건이었다.

1·21사태는 북한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를 기습하려 한 사건이다. 하마터면 전쟁이 촉발될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미국이 남한의 보복조치를 막는 바람에 넘어간다.(박정희 대통령 암살 기도는 6년 뒤 또 한 차례 있었는데 74년 육영수 여사 살해 사건이 그것이다)

1·21사태에 따른 국민적 공포가 채 가시지 않은 이틀 뒤인 1월 23일에는 미국 정보함 푸에블로호가 원산 앞바다에서 북한에 납치되는 일이 벌어져 국제사회를 흔들어 놓는다. 푸에블로호는 승무원 83명을 태우고 북한 해안에서 40km 떨어진 동해상에서 정보 업무를 수행하다가 북한의 초계정 4척과 미그기 2대의 위협을 받고 나포된다. 북한은 사건 발생 후 거의 1년이 다 되어가는 68년 12월 23일 판문점을 통해 승무원 82명과 유해 1구를 송환했다.

반공과 안보는 우리의 생존을 지키는 지상과제가 되었다. 박 대통령은 1968년 2월 1일 오후 경부고속도로 기공식이라는 역사적 행사에 참석한 자리에서 “싸우면서 건설하자”며 이렇게 말했다.

“은인자중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엄숙히 북괴에게 경고한다. 대한민국 성장에 가장 위협을 느끼고 배 아파하는 자들이 김일성 도당들이다. 입으로는 평화통일을 주장하지만 목표와 전략은 해방부터 지금까지 적화통일이라는 데에 변함이 없다. (…) 우리 국민들은 한쪽으로는 공산주의자들과 투쟁하면서 다른 한쪽으로는 건설을 하는, 싸우면서 건설해 나가는 그런 국민이 되어야 한다.”

바로 며칠 뒤인 2월 7일에는 “그놈(북한)들이 뭐 대단한 것을 가지고 내려오는 게 아니라 기껏 소총하고 수류탄 몇 발 들고 오는데, 지금처럼 공비 20∼30명을 섬멸하려고 몇 개 사단을 동원하다 보면 전방은 누가 지키나. 예비역들 한 200만 명 정도만 무장시켜 대항하면 되지 않겠는가”라고 말하며 향토예비군 구상도 밝힌다.

박 대통령은 미국에도 쓴소리를 서슴지 않았다. 2월 12일 미국의 저명한 칼럼니스트 잭 앤더슨 기자와 청와대 단독 회견을 가진 자리에서 “북괴가 오만해지는 이유는 그들의 도발 행위에 얼굴을 돌리는 미국 정책 때문”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어 “한국의 방위가 유엔군사령관의 책임하에 있고 한국군이 유엔군사령관 작전 지휘하에 있기 때문에 무장 간첩 침투사건(1·21사태)과 푸에블로호 사건에 대해 응징 조처를 취하지 말라는 미국의 요청을 받아들이겠다. 하지만 이번 사건에 대한 유엔군사령관의 처사는 예의 주시하겠다”는 경고성 발언까지 했다. 앤더슨 기자는 이 회견기를 이틀 뒤 ‘워싱턴포스트’에 실었다.

공비 출몰의 불안 속에서 4월 1일 250만 향토예비군이 창설됐다.

하지만 북한의 도발은 끊이지 않아 10월 30일엔 경북 울진 삼척에 130여 명의 무장공비가 침투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무장공비들은 1·21사태 때 남쪽의 민간인들이 공비들을 신고해 일망타진되었다며 민간인들을 잔인하게 살해했다.

11월 21일부터는 18세 이상 모든 국민에게 일련번호를 부여하는 주민등록증제도가 실시됐다. 12월 5일엔 대통령 이름으로 국민교육헌장이 발표된다.

박 대통령은 1968년 11월 30일 수출의 날 치사에서 울진 삼척 무장 공비 사건을 언급하며 결국 경제성장만이 북한 동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연설했다.

“공산주의로 경제 건설에 성공한 나라는 이 지구상에 하나도 없다. … 북한 경제가 성장이 되고 수출이 많이 늘고 북한 동포들의 생활수준이 올라가 번영을 누리게 되면 북한 동포들 머릿속에 좀더 자유롭게 잘살아보겠다는 욕구가 생길 것이다. 이것은 공산주의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다.”

북한의 도발은 이듬해인 69년에도 계속됐다. 4월 7일 중서부 전선에 300여 발의 포격을 했으며 4월 15일엔 미 해군정보기(EC―121)를 동해상에서 격추시켜 31명이나 되는 사망자를 냈다.

이런 상황에서 69년 7월 25일 미국 대통령 닉슨은 괌에서 이른바 ‘닉슨 독트린’(괌 독트린이라고도 불림)을 발표한다. “아시아 국가들은 미국 의존도를 줄이고 안보 문제를 독자적으로 해결하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한국에서의 미군 철수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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