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먼 동아일보 컬처] 이지현의 아주 쉬운 예술 이야기… 오늘 하루 몇 번이나 참으셨나요? 에릭 사티의 ‘짜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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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4월 5일 09시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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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로부터)연인이었던 수잔 발라동이 그린 에릭 사티 초상, ‘짜증’ (벡사시옹:Vexations) 악보, 에릭 사티 캐리커처
▲ (좌로부터)연인이었던 수잔 발라동이 그린 에릭 사티 초상, ‘짜증’ (벡사시옹:Vexations) 악보, 에릭 사티 캐리커처

4차원 작곡가 에릭 사티
오늘 하루 몇 번이나 짜증을 참으셨나요? 짜증의 끝을 보여주는 음악 하나 소개해 드릴까요? 바로 위에 있는 악보 1장을 840번이나 반복해서 연주한다는 에릭 사티의 ‘짜증(벡사시옹:Vexations)’입니다. 에릭 사티하면 ‘짐노페디’ 같은 감미로운 곡을 떠오르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에릭 사티는 괴짜로 유명합니다.

아카데미즘에 반기를 들었던 작곡가답게 ‘야무진 데가 없는 개를 위한 전주곡’, ‘역겨운 선 멋쟁이를 위한 세 개의 품위 있는 왈츠’, ‘말라버린 배아’, ‘나무로 된 뚱뚱한 남자의 스케치와 교태’ 등 지금까지 누구도 붙인 적 없던 희한한 제목을 붙였습니다.
보통의 작곡가들이 붙이는 ‘우아하게’, ‘노래하듯이’ 같은 악곡 설명 대신 ‘의문을 가지고 연주할 것’, ‘구멍을 파듯’ 같은 독특한 지시어를 붙였죠.

검은 모자에 검은 옷, 박쥐모양의 우산을 쓰고 다녔고,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파리음악원에서 쫓겨났습니다. 여러 화가들과 염문을 뿌렸던 수잔 발라동에게 버림받은 후에는 평생 혼자 살았고요. 외롭지만 자유롭게 살았던 에릭 사티는 문제작, ‘짜증’을 남겼습니다.

짜증을 지나 도 닦는 심정으로
감미로운 멜로디도 몇 번 들으면 질리는데, 알 수 없는 음의 나열을 840번이나 반복해서 들어라? 그럼, 대체 시간은 얼마나 걸릴까요? 실제로 연주된 적은 있었을까요?
세상을 향한 도전 의식이 강한 사람들은 늘 있는지라, 1963년 뉴욕에서 11명의 연주자가 15시간 이상 밤을 지새우며 이곡을 연주했습니다. 반응도 참 제각각입니다. 연주자는 “이곡을 500번 이상 연주하면 환각증세가 오며 스스로 연주를 포기하게 된다”고 했고, 평론가는 “어지간한 인내심 없이는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음악”이라고 했습니다. 청중 중에는 “처음엔 지겨웠는데, 나중엔 도 닦는 기분이 되었다”고 말한 사람도 있었답니다.

짧은 멜로디의 끝없는 반복은 훗날 미니멀리즘에 큰 영향력을 미쳤지만, 에릭 사티는 그저 나다운 스타일을 보여준 것 같습니다. 정말 짜증을 견디다 보면 도 닦는 상태가 되어 순간과 삶이 보일까요? 오늘도 여기저기 눈치 보느라 나 하고 싶은 말 한마디도 못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에릭 사티처럼 자유인으로 세상을 살 수 있다는 게 새로운 제안이 될 지도 모르겠네요.

글·이지현(‘예술에 주술을 걸다’ 저자)
※ 글쓴이 이지현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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