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리포트]조기교육 찬반 논쟁

  • 입력 2001년 2월 5일 18시 3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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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사교육 열풍’은 과연 그대로 지켜보며 따라갈 수밖에 없는 것인가. 본보는 격렬한 찬반론에 휩싸인 이 현상을 지난 회에 분석적으로 소개한 데 이어, 나름대로 대표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양측 논객들이 한자리에 모여 문제를 진단하고 상대방의 입장을 점검해볼 수 있는 본격 토론의 기회를 마련했다. 이 토론은 두가지 의미를 가졌다. 첫째, 조기 사교육 찬반론자들이, 특히 찬성론자의 경우 지명도가 있는 사교육업체의 책임자들이 직접 토론에 참석한 것은 국내에선 처음이었다. 둘째, 이 토론은 언론이 특정내용을 일방적으로 전달하거나 주장하는 것이 아닌 일종의 ‘쌍방향 소통형 보도’의 사례로 시도됐다는 점이다. 4시간 가까이 진행된 이날 토론은 예상대로 타협이 거의 불가능한 것이었고, 특정 대목에서는 거의 ‘험악한 상황’까지 이르기도 했다. 그러나 일부 소득도 없지 않았다. 독자들이 양쪽 입장의 논거를 직접 접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주요대목을 지상중계한다.》

―조기교육의 파행상이 두드러지면서 학계 업계 학부모 등 관련자들 간의 논쟁이 뜨겁다. 이 자리를 찬반 양론의 대치점을 확인하고 향후 생산적 토론이 이뤄지는 출발점으로 삼았으면 한다. 먼저 각자의 기본입장을 확인하자.

▽이원영〓연령별 조기교육에 집착하다보면 본질이 왜곡될 것은 자명하다. 그래서 요즘 ‘적기(適期)교육이 중요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조기사교육은 초중고교의 주입식교육이 더욱 낮은 연령대에서 이뤄지는 양상이다.

▽우남희〓아예 초(超)조기교육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특히 우려되는 점은 그런 교육이 기능적인 방향으로만 치우친다는 것이다.

▽송형석〓그렇다면 몇 살부터 얼마 만큼의 적합한 교육을 하느냐가 문제의 핵심일 것 같다. 연령대별 특성을 무시한 획일성을 막으면 문제의 소지를 줄일 수 있지 않은가.

▼글 싣는 순서▼

- 조기교육에 멍드는 아이들
- 조기교육 찬반 논쟁
- 맞벌이 부부의 육아 고민
- 가정교육의 실종과 왜곡
- "맡아만 줘도 고마워요."
- 끝없는 논란 '보육 vs 보육'
- 손 놓고 있는 국가

▼부모 막연한 불안감이 원인▼

▽황은주〓아이들은 말 그대로 잠재력 그 자체다. 원석(原石) 상태로 놔둘 수만은 없는 존재라는 말이다.

▽이〓‘적합한 조기교육’이 뭐라고 생각하나.

▽송〓무작정 초등학교 과정을 영유아기로 낮추는 게 좋을 리 없다. 나는 ‘시스템에 의한 조기교육’이 가능하다고 본다.

▽우〓한두 살짜리도 틀과 시스템에 맞춘 프로그램으로 조기교육이 가능하다는 얘기인가.

▽송〓영국 등 8개 선진국에 가봤더니 모두 조기교육을 하고 있더라. 이런 외국의 조기사교육도 모두 잘못됐다는 것인가. 우리가 주입식 교육만 시킨다는 것은 오해다.

―‘조기교육의 가치’에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구체적으로 조기교육의 효과가 검증된 적이 있는가.

▽이〓송사장은 영어교육을 포함해 조기유아교육의 국제적 추세를 보면 당위성이 있다는 얘기다. 송사장은 주로 ‘교육 사업자’들과 만났던 것 같다. 내가 아는 영어권 교육학자 중에는 “어릴 때부터 영어 배우는 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증언한 이도 있다.

▽송〓우리 현실의 모습이 최선인지는 알 수 없지만 현실을 무시한 대안은 공허할 수 있다. 내가 운영하는 학원에는 영어반 외에 유치반을 별도로 두고 있다.

▽이〓사교육장에서 유치반을 운영한다니 그 만큼 기능위주 교육의 폐해를 중화해보겠다는 것 아니냐. 이제 돈도 많이 벌었을테니 사교육을 접고 공교육권으로 들어오는 게 어떠냐.

▽우〓최근 실증적 조사에서 유아들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교육받은 내용을 대부분 잊어버린다는 결과가 많았다. 조기교육의 허구성이 부분적으로 입증된 셈이다.

―문제는 상당수의 부모가 현재 조기교육을 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과연 ‘제대로 된 시스템’이 가능할까.

▽송〓학부모들은 바보가 아니다. 사교육기관은 나름대로 독창적 프로그램을 만들고 학부모들은 냉정한 평가자가 되는 시장원리가 적용되고 있다.

▽이〓그게 교육을 ‘사업’으로 보는 전형적 시각이다. 대단한 시각차이다. 그런 상황에선 아무리 ‘시스템’을 얘기하더라도 특정 연령대를 위한 획일적 프로그램이 나올 수밖에 없다.

▽송〓사교육의 역동적 힘을 무시해선 곤란하다. 영어교육의 패턴이 문법에서 회화로 바뀐 것도 90년대 초 사교육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대목을 전후해 두 업체 대표는 ‘공교육의 대안’으로서의 자사 프로그램의 우수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토론에서 찬반론자 모두 그 교육효과가 채 검증되지 않았다는 점에 동의했다.)

―생후 3개월부터 중국어, 일본어를 가르치는 경우마저 있다. 이렇게 무차별로 사교육을 받는 아동들의 인성교육은 어떻게 할 건가.

▽이〓사교육에서 어떻게 인성교육이 이뤄지겠나. 유아들에게 쏟아붓는 ‘인지교육’은 대개 ‘밑빠진 독에 물붓기’다. 그런 아이들은 나중에 강박관념 때문에 실수하는 것을 겁내고, 결국 새로운 것울 배우는 데 소극적이 된다. 책임감도 결여된다. 제발 아이들을 그냥 좀 내버려두자. 학부모가 ‘돈줄’이라 그들 구미에 맞추는 것인가. 검증조차 안된 프로그램에 아이들을 마구 맡기는 것은 남에게 뒤지면 안된다는 막연한 불안감 때문이다.

▽송〓무조건 안시키는 것도 ‘획일화’일 수 있다. 학문적 입장에서 당위성만 따지면 곤란하다. 애들을 가르치다 부진한 아이의 부모에게 “당신 애가 좀 떨어진다”고 하면 부모는 “우리 아이가 왜 떨어지냐”고 무조건 반문한다. 학계에서는 차라리 각연령수준에 필요한 교육이 어떤 것인지 연구해줬으면 한다.

▼"인성교육이 더 중요"▼

▽이〓많은 부모들이 아이들 스스로 뿌리 내리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학습 노동’을 강요한다. ‘기능인’과 ‘제대로 된 사람’ 중에 어느 쪽을 길러낼 것인지 선택해야 할 시점이다.

▽황〓‘공교육은 바람직하다’고 전제하는 것 같은데 그러면 조기사교육이 번성하겠는가. 초등학교 3학년생의 학교 숙제가 무조건 인터넷에서 무엇무엇을 찾아오라는 식이다. 현실은 이렇게 완전히 허공에 떠 있다.

▽송〓조기사교육이 누가 조정해서 과열된 것이라면 지금쯤 사라졌어야 한다. 그런데 이건 90년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계속됐고 증가추세다. 중국은 우리보다 영어 사교육 열풍이 더 심하다. 그쪽은 사회주의라 사교육이 허용되지도 않는데 그만큼 무시할 수 없는 시장의 수요가 있다는 것이다.

(토론자들은 여기서 ‘교육〓산업’론과 ‘시장’ ‘수요’ 등의 용어를 놓고 상대방 말을 끊어가며 치열한 논박을 벌였다. 사회자의 중재로 겨우 화제를 돌려 토론을 마무리했다.)

▽우〓수요라고 하지만 한 아이가 보통 3,4군데 사교육기관을 전전하며 생기는 가수요(假需要)는 생각 안 해봤나.

▽송〓시장의 패턴이 부모의 맹목적 욕심에 따른 점도 없지 않을 것이다. 우리도 정부가 사교육 수요까지 흡수해준다면 장사 안한다. 마음 놓고 보낼 곳이 없으니 안정된 기관에 맡기고 싶은 것 아닌가.

▽이〓예상대로 많은 부분에서 평행선임을 확인했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해두자. 사교육 과정에 아이들의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교육 받은 아이들이 어떤 정서적, 학습적 반응을 보이는지 학계와 교육산업계가 동시에 조사해볼 것을 제안한다.

▼토론을 보고:현실론 對 원칙론 팽팽 …공론화 시급 공감▼

이날 토론은 한치의 양보도 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된, 보기 드문 격론이었다.

찬성론자들은 조기사교육이 자신의 ‘생업’이라는 점에서, 반대론자들은 유아교육계에서 이 문제에 비판적 시각을 견지해 온 대표자들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예견된 것이기도 했다.

구체적인 토론과정에서 찬성론자들은 주로 조기교육이 거역할 수 없는 현실로 자리잡았다는 입장을 취한 반면, 반대론자들은 영유아 시기의 인성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기능’과 ‘학습’ 위주의 조기교육에 무용론으로 맞섰다.

특히 반대론자인 두 학계인사는 조기교육 과열의 원인으로서 ‘부모의 불안감과 허영심’을, 그 폐해로서 ‘아동의 책임감 결여’ 등 각종 병리적 부작용을 각각 제시했다.

이에 대한 찬성론자들의 답변은 주로 ‘기대에 못 미치는 공교육’에 대한 일종의 대안으로 사교육이 존재한다는 것이며 그 현실적인 수요는 ‘시장’에서 학부모들이 판단할 것이라는 식이었다. 조기교육이 ‘국제적 추세’라는 주장도 있었다.

이렇게 보자면, 양측의 논점은 ‘현실론’과 ‘원칙론’에 치우쳐 있었던 셈이고 그런 점에서 토론의 접점을 찾는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찬반론자 모두 영유아들이 ‘상품화의 대상’이 되어선 안된다는 점, 정부가 직접 나서서 조기교육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점 등에는 가까스로 의견일치를 보았다.

이번 토론을 통해 영유아의 눈높이와 연령대에 맞는 교육 및 성장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학부모 학계 정부 등 관련 당사자들이 함께 참여하는 ‘공론의 장’이 시급히 마련되어야 한다는 점이 부각됐다.

<기획취재팀>

반병희기자 bbhe424@donga.com

이헌진기자 mungchii@donga.com

이승헌기자 dd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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