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빨갱이’를 빨갱이라 부르지 못하는 나라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3월 3일 23시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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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깔론은 청산해야 할 친일잔재” 뜬금없는 대통령의 3·1절 연설
북한과는 평화 공존 외치면서 표현의 자유 막겠다는 文정부
총선을 內戰처럼 치를 의도인가

김순덕 대기자
김순덕 대기자
“우리에겐 독립운동과 함께 민주공화국을 세운 위대한 선조가 있고, 절대빈곤에서 벗어나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이룬 건국 2세대와 3세대가 있다.”

“사상범과 빨갱이는… 해방 후에도 친일청산을 가로막는 도구가 됐고… 국민을 적으로 모는 낙인으로 사용됐다.”

문재인 대통령이 달라졌다. 지난해 3·1절 기념식사(위)와 올해(아래)를 비교하면 확연하다.

대통령 연설문은 국가 최고지도자의 인식과 정책을 드러내는 공식문서다. 작년의 대통령은 근대화, 산업화에 앞장서 세계 10위권의 경제를 이룩한 보수우파를 ‘건국 2세대’로 평가했다. 이번엔 “지금도 우리 사회에서 정치적 경쟁 세력을 비방하는 도구로 빨갱이란 말이 사용되고 있다”니, 빨갱이를 빨갱이라 비판한 보수우파는 친일파로 몰릴 판이다.

연설기획비서관이 바뀌었기 때문이라면 차라리 다행이겠다. 빨갱이라는 자극적 단어를 대통령 연설문에 다섯 번이나 써야 했는지 청와대 안에서 반대가 없었을 리 없다. 이를 관철시킨 것은 문 대통령이었다는 보도다.

북핵을 완성한 김정은의 변화를 남북관계 진전으로 믿고 한반도 운명 주도에 나설 만큼 자신감이 생겨서라면, 100년 전과 다름없는 우물 안 개구리다. 대선 직전에 낸 책에서 밝힌 대로 “친일파가 독재와 관치경제, 정경유착으로 이어졌으니 친일 청산이 이뤄져야 사회정의가 바로 선다”고 여전히 믿는 것 같다. 반대할 자유가 없는 김씨 왕조의 북한과는 평화 공존을 강조하면서 색깔론을 제기하는 정치 세력을 청산해야 한다니 민주주의라고도, 민족주의라고도 하기 어렵다.

대통령이 사실에 입각하지 않은 인식으로 국정운영을 하는 것은 위험하다. “좌우 이념의 낙인은 일제가 민족의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사용한 수단”이라는 연설문을 보면 민족화합을 위해 국가보안법을 손보거나 친일잔재청산 특별조치라도 내릴 태세다. 그러나 더불어민주당이 지난달 연 심포지엄에선 “많은 식민지 약소민족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조선에서도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공산주의를 통해 새로운 민족독립의 방안을 모색했다”는 발표가 나왔다. 일제가 우리를 이간질하려고 독립운동가들 모두 ‘아카(アカ)’로 낙인찍었다는 건 지나친 일반화인 셈이다.

‘빨갱이의 탄생’을 쓴 김득중은 빨갱이를 죽어 마땅한 비(非)국민으로 모는 것은 1948년 여순사건 때 양민 학살에서 생겨났다고 했다. 빨갱이 소리 듣기 싫다고 친일 잔재 청산 운운하지 말고 반공(反共) 잔재 청산을 외치는 게 솔직하다는 얘기다.

이 책의 서평으로 정해구 대통령직속 정책기획위원장은 2009년 의미심장한 글을 남겼다. “해방과 더불어 남한 내부에선 친일파를 포함한 반공 우파세력과 좌파세력 간에 새 정부 수립을 둘러싼 치열한 경쟁과 갈등이 전개됐다”며 “이승만 정부에 의해 최종적으로는 좌파세력이 완전히 제거되는 것으로 귀결됐다”는 것이다. 따라서 8월 15일을 건국절로 삼는 것은 좌파에 대한 반공 우파의 승리, 북에 대한 남의 분명한 정통성을 확인하는 의미가 된다며 반대를 시사했다. 그렇다면 이승만 정부가 진짜 빨갱이들에게 무너지고, 우리가 김정은 아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살고 있어야 옳단 말인가.

나는 8월 15일을 건국절로 정해 내분을 일으킬 것까진 없다고 생각해 왔다. 그럼에도 건국절에 반대하는 세력의 진짜 이유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확인하니 경악을 금치 못하겠다. 그런 이념을 갖고 있으면서 지난해 사법부까지 장악하는 청와대발(發) 개헌안을 마련했고, 지금 대통령 곁에서 국정기획을 하고 있다는 것도 섬뜩하다.

표현의 자유까지 갈 것도 없다. 빨갱이를 빨갱이라 부를 수 없는 나라는 북한과 다름없는 전체주의 국가다. 좌빨도 아니고, 주사파도 아니고, 빨갱이라는 자유당 때 단어가 다시 들리는 데는 현 정부의 책임이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외국 언론에서 북한 대변인이라고 할 만큼 친북적인 언행과 정책을 보이니 시대착오 같은 빨갱이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통합을 말해도 믿기 힘들 판에 대통령은 갈등 조장 언어를 발설했다. 2020년 총선을 내전(內戰)처럼 치르겠다는 의도가 아닌지 걱정스럽다. ‘민주당 50년 집권론’이 핵을 쥔 35세의 김정은과 더불어 자유 없는 평화로 가겠다는 것인지 눈을 부릅뜰 일이다.

김순덕 대기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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