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나무 아래서]〈10〉뒤뚱거리며 꿀벌들이 돌아왔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8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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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신이현 작가
신이현 작가

꿀벌을 구해야겠다고 레돔이 말했다. 그가 뭔가를 ‘구해야겠는데’ 하고 말하면 나는 괜히 심장이 벌렁거린다. 꿀도 아니고 벌이라니, 그놈들을 어디 가서 구해 오란 말일까. 햄스터나 물고기를 파는 가게는 봤지만 벌을 파는 곳은 보지 못했다. 벌은 몇 마리씩 사야 하지? 1000마리? 3kg? 어떻게 들고 오지? 어디 벌 좀 살 데가 없을까요? 아니, 꿀 아니고 벌을 사려고요. 키우려고 해요…. 나는 이렇게 수소문을 시작했다.

“벌을 아무 데서나 사면 100% 병들거나 너무 약한 것들을 팔아먹는단 말이야. 데리고 와서 한두 달 뒤면 싹 죽어버려. 믿을 만한 곳에서 사야 돼. 내 친구 양봉쟁이가 있는데 지금 지리산에 들어가서 한 달 뒤에나 나온다 하니 기다려 봐.”

수소문 끝에 들은 답을 농부에게 일렀더니 그는 당장 구해야 한다고 했다. 곧 아카시아 꽃이 필 것인데 그 시기를 놓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벌 안 키우면 안 될까? 그 위험한 벌레가 꼭 필요해? 쏘이기라도 하면 어쩔래.”

솔직히 나는 그가 필요한 것들을 찾아다니는 일에 좀 지쳤다. 와인을 만드는 데 필요한 기계들뿐만 아니라 농사에도 필요한 것이 너무 많았다. 더구나 일반 농기구상이나 농약상에도 없는 것들만 찾아내라고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상한 단어가 쓰인 종이를 쥐고 이글이글 타는 사막을 걸어가는 기분이 들곤 했다. 유기농 소똥이나 붉은 해초 가루, 현무암 가루…. 그런 것들에 비하면 사실 벌은 그렇게 어려운 미션도 아니었다.

“벌은 정말 위협을 느끼지 않는 한 쏘지 않아. 침을 쓰는 순간 자기도 죽는데 그렇게 함부로 쏘겠어. 농장의 하모니를 위해 농사짓는 사람에게 벌은 기본인데.”

수소문의 여왕은 이윽고 친구의 삼촌이 벌을 판다는 소식을 가져왔다. 우리는 트럭을 타고 그곳으로 갔다. 레돔은 벌들이 모두 벌통으로 귀가할 때까지 꼼짝 않고 기다렸다. 마지막 한 마리의 벌이 벌통에 다 들어갈 때까지 기다렸다. 꿀을 잔뜩 물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집도 동료도 새끼도 모두 사라지고 저 혼자 남게 되는 벌이 생기면 큰일이라는 것이었다.

“아이고 이 프랑스 남자분 보통이 아니네. 야물다 야물어.”

친구의 삼촌은 레돔의 꼼꼼함과 인내심에 혀를 내두르며 알뜰하다고 감탄했다. 어느덧 어둠이 내리고 우리는 캄캄한 도로를 달려 사과밭으로 갔다. 그는 벌통을 안고 조심조심 점지해둔 늙은 사과나무를 향해 갔다. 시간은 밤 11시였고 사과밭 올라가는 길은 좁고 가팔랐다. 벌통을 안고 엎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조마조마했다.

벌들 또한 이 수상쩍은 움직임을 느끼는지 붕붕 소리도 없이 잠잠했다. 인간들아, 우리를 대체 어디로 데리고 가느냐, 어쩔 심산이냐. 가만두지 않을 테다. 몽땅 도망가 버릴 테다. 꿀은 바라지도 마라. 이런 말들을 속삭이고 있는지도 몰랐다. 레돔은 미리 준비해둔 벽돌 위에 벌통을 놓고 벌들이 마실 깨끗한 물도 떠놓았다.

“여기도 괜찮단다. 이제 아카시아가 지천으로 피고 토끼풀 꽃도 잔뜩 핀단다. 오늘 밤 잘 쉬고 내일 천천히 나오렴. 물도 마시고. 새로운 세상으로 이사 온 걸 환영해 꿀벌들아.”

농부는 벌통에다 대고 이렇게 말했다. 벌들이 프랑스 말을 알아먹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진심을 다해 말했다. 이국만리에 와서 벌들에게 모국어를 쓰는 것을 보니 왠지 울컥해졌다. 나는 알자스 시댁에 갈 때마다 프랑스어 멀미를 했다. 일주일이 지나면 한국어를 쓰는 영혼은 유체이탈해서 로봇이 되어 돌아다니는 내 몸뚱이 위를 떠다니는 지경이 되곤 했다.

벌들의 이사는 성공적이었다. 아침이면 팽팽 소리 내며 날아가 뒤뚱거리도록 꿀을 품고서 돌아왔다. 여왕벌은 엄청난 속도로 새끼를 쳤다. 농부는 손등에 벌이라도 앉으면 하염없이 들여다보며 너 참 귀엽구나 하면서 긴 모국어 토킹을 시작했다. 지금 이곳에서 그는 별일 없는 것일까, 물어보고 싶었지만 매번 너무 피곤해서 그냥 자버렸다.
 
신이현 작가

※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 씨와 충북 충주에서 사과와 포도 농사를 짓고 살고 있습니다.
#꿀벌#아카시아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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