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잔을 들며/정목일]12월에 새기는 목리문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2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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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목일 수필가·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
정목일 수필가·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
12월은 자신에게 말을 거는 달…. 나무들도 땅에게 낙엽 편지를 전하고 있다. 자연의 순환과 순응을 보며 지금 어디에 서 있으며,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생각한다. 사람마다 바쁘게 길을 달려, 이 순간을 맞고 있다. 나무나 인간이나 자신이 선 자리가 우주의 중심이다. 마음의 중심에 한 자루의 촛불을 켤 때가 왔다. 초 하나씩이 일생이라면 내 초의 분량은 이제 얼마만큼 남았는가.

내 촛불은 한 사람에게라도 위로, 용기, 미소, 노래, 희망, 온정의 빛이 돼 주었던가. 자신만의 이익과 앞일을 위해 달려온 세월이건만, 촛불은 소리 없이 타 들어가 난쟁이처럼 돼 버렸다.

12월이면 시간이 지나는 초침 소리가 들리고, 심장의 박동이 느껴진다. 나무들은 아름다움으로 채색했던 꽃과 단풍을 지우고 벌거숭이로 돌아간다. 혹독한 추위와 고독을 견뎌낼 의지를 다짐하는 순간이다.

11월에 시드니로 문학기행을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 교포 2세인 여행 안내자의 자기소개에 일행들은 뜻밖에 모두 감격하고 말았다. 군인 출신인 아버지가 호주로 이민 가서 그곳에서 나서 자란 두 아들은 한국을 찾은 적이 없었다고 했다. 어느 날 장성한 두 형제를 불러 앉힌 아버지는 “너희들 가슴속에 한국인의 피가 흐름을 잊지 말라”고 하시며, 두 형제가 외국인의 신분이지만 한국군에 자원입대하여 복무하는 일이 한국을 아는 데 가장 좋은 방법임을 역설하셨다. 조국을 위해 남자가 행할 수 있는 한 번의 의무를 마쳐 주길 바란다고 했다.

아버지의 말을 듣고 두 형제는 논산훈련소에 입대하여 2년간의 복무를 마쳤다. 시드니로 돌아간 두 형제는 아버지 앞에 거수경례를 하며 ‘제대 신고’를 했고, 세 부자(父子)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얼싸안고 한참 동안 울었다고 했다. 일생에 있어서 가장 뿌듯하고 조국이 있음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뼈저리게 느꼈다고 했다. 일행들은 박수를 치며 안내자에게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세 부자가 너무나 고맙고 감사해서였다.

한 해를 마감하는 12월이면 이런 흐뭇한 일을 떠올리면서 옛 친구와 차를 마시고 싶다. 정신없이 달려가던 내 삶의 질주는 인생을 위한 바른 길이었으며, 행복을 가져다주었던가를 생각한다. 자신의 삶만을 생각하지 않고 주변과 이웃에도 관심과 온정의 손길을 뻗쳤던가, 돌아볼 일이다. 마음에 묻은 이기심이라는 때, 화냄이라는 얼룩, 어리석음이라는 먼지를 털어내고 겨울나무처럼 빈 마음으로 서야 한다.

겨울나무는 성자 같다. 계절을 알려 주고 삶의 길을 가르쳐 준다. 나무들은 이때를 기다려 1년마다 한 줄씩의 나이테로 목리문(木理紋)을 가슴속에 새긴다. 목리문은 나무가 일생을 통해 집중력을 쏟아 그려낸 삶의 추상화이다. 나무처럼 녹음, 꽃, 열매, 단풍으로 주변을 생기롭게 만들어 감동을 주어야 목리문을 얻을 수 있다. 나도 1년의 삶에서 어떻게 깨달음의 꽃을 피워내 한 줄의 목리문을 새길 수 있을까.

정목일 수필가·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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