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전에 이것만은…/노지설]제주 올레길 완주하며 ‘이 순간의 행복’을 누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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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0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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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노지설 방송작가
노지설 방송작가
“시한부 얘기를 해보자. 하지만 절망 대신 희망과 행복을 얘기하자.”

드라마 ‘여인의 향기’는 이 두 문장으로 출발했다. 처음엔 나쁜 검사가 시한부 판정을 받고 개과천선하는 이야기, ‘88만 원 세대’가 불치병에 걸려 좌충우돌하는 이야기 등을 놓고 고민했다. 주인공이 나쁜 검사라면, 88만 원 세대라면 죽기 전에 뭘 하고 싶을까 고민했지만 잘 풀리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감독님과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나라면 죽기 전에 그동안 내기만 했지 받지 못한 결혼 축의금을 꼭 받으러 다니겠다”라는 얘기를 농담처럼 던졌다. 그 자리에서 주인공은 노처녀로 결정됐다.

시한부라는 소재의 특성상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바로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 즉 버킷리스트였다. 그게 곧 드라마의 줄거리인 셈이니까. 주인공인 연재(김선아 분)의 버킷리스트를 만들기 위해 엄청나게 공을 들였다. 방송사 홈페이지를 통해 설문조사를 하기도 했고, 보조 작가와 머리를 맞댄 채 수백 개의 버킷리스트를 뽑았다. 드라마 소재를 잡은 2월부터 버킷리스트가 등장하는 4회 대본이 나오던 6월 말까지 줄곧 버킷리스트에 대해 논의했고, 이를 거쳐 버킷리스트 수를 차츰 줄여나갔다.

연재에게 스카이다이빙이나 번지점프를 시켜볼 생각도 있었지만 김선아 씨가 고소공포증을 갖고 있는 관계로 탈락됐다. 그 대신 진짜 사랑하는 사람과 듀엣 곡을 불러보고 싶다는 김선아 씨의 아이디어가 더해져 장장 4개월 만에 ‘연재의 버킷리스트’가 완성됐다.

1. 하루에 한 번씩 엄마를 웃게 만들기 2. 나를 괴롭혔던 놈들에게 복수하기 3.탱고 배우기 4. 갖고 싶고, 먹고 싶고, 입고 싶은 것 참지 않기 5. 웨딩드레스 입어 보기 6. 톱스타 준수랑 데이트하기 7. 자전거로 해안도로 달리기 8. 하루 동안 영화 속 주인공처럼 살아 보기 9. 첫사랑 찾기 10. 진짜 사랑하는 사람과 듀엣 곡 불러보기 11. 세상 모든 여자가 부러워할 만한 프러포즈 받아 보기 12. 틈틈이 봉사하기 13. 엄마 재혼시키기 14. S에게 용서 구하기 15. 누군가의 의미 있는 은인 되기 16. 내 인생의 흔적 남기기 17. 날 아는 사람들에게 멋진 여자로 기억되기 18. 화이트 크리스마스에 눈 맞으며 키스하기 19. 이 모든 것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기 20. 사랑하는 사람 품에서 눈 감기.

극중 연재가 수첩에 써내려간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스무 가지’다. 특별할 것은 없다. 불가능한 일도 없다. 하지만 이 일들을 주인공인 연재는 하지 않았다. 죽음을 선고받기 전까지는.

하고 싶은 일은 많지만 실천하지 않는 건, 나 역시 마찬가지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어보는 건 내 오랜 꿈이다. 한때는 돈이 없어 엄두를 못 냈고, 한때는 시간이 없어 엄두를 못 냈다. 지금은? 체력이 없어서 엄두를 못 내고 있다.

드라마 ‘여인의 향기’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건 시한부 판정을 받은 여자의 절절한 ‘사랑’이 아니라 ‘행복’이었다. 아주 먼 미래의 행복이 아닌 지금, 바로 오늘, 이 순간의 행복 말이다. 나중에, 나중에 하면서 미뤄뒀다간 영원히 못하게 될 그 일을 지금 하자. 그래야 행복해진다. 그런 주제를 매일 생각하며 8개월을 보냈으니 이젠 나도 좀 달라질 때가 되긴 됐다.

아주 오래전에 왕자웨이(王家衛) 감독의 인터뷰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매번 완성된 시나리오도 없이 촬영을 시작하는 그에게 한 기자가 물었다. 왜 좀 더 완벽하게 준비해놓고 시작하지 않느냐고. 그 질문에 왕 감독이 이렇게 대답했다.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충분할 만큼 완벽한 때라는 건 없는 것 같다고. 그의 말이 뇌리에 강하게 남았다. 때론 충분하지 않아도 저질러 볼 용기가 필요하다. 그래야 인생이 더 풍성해질 테니까.

얼마 전에 제주 올레길 19코스가 개장했다고 한다. 이번 달 안으로 그동안 완주 못했던 올레길에 다시 한번 도전해볼 생각이다. 드라마를 쓰는 동안 체력이 뚝 떨어졌다. 더 늦기 전에 이 저질 체력으로라도 걸어봐야겠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완주할 날도 오겠지.

노지설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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