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장영희]돈과 사랑

  • 입력 2006년 9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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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책상 정리를 하다가 책꽂이 뒤에 박혀 있는 작은 노트를 발견했다. 작년 영작 시간에 학생들에게서 걷은 영어일기 중 수미 것을 잃어버려 돌려주지 못했는데, 이제야 나타난 것이다. 방 치우는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나는 잠깐 수미의 일기장을 다시 읽어 보았다.

2005년 6월 3일의 일기를 대충 우리말로 번역해 보면 다음과 같다. “나와 내 남자친구는 서로 정말 사랑한다. 하지만 우리는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 둘 다 너무 가난하다는 것이다. 내 친구들은 영화관도 자주 가지만 우리는 돈이 없어 못 갈 때가 많다. 남들이 롯데월드에 갈 때 우리는 노고산에 가고, 남들이 갈비집에 갈 때 우리는 분식집에 간다. 그는 아르바이트를 해도 어머니께 돈을 갖다 드려야 한다. 어디선가 ‘가난이 앞문으로 들어오면 사랑은 옆문으로 빠진다’는 말을 들었다. 가난이 싫어서 어떤 때는 그와 헤어질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그리고 마지막에 수미는 괄호 속에 ‘선생님,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라는 질문을 하고 있었다.

수미의 질문 밑에 나는 다음과 같은 답을 써 놓았다. “중요한 것은 누구와 함께 있는가이지, 무엇을 먹고 어디를 가는가는 중요하지 않단다. 오직 돈 때문에 지금 남자친구와 헤어지면 먼 훗날 후회하게 될 거야. 돈이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아니니까.”

마치 영원한 진리라는 듯, 굵고 힘 있는 필체로 내가 쓴 문장이었다. 돌이켜 보건대 그것을 쓸 때만 해도 난 선생으로서 내 충고가 수미의 삶에 큰 도움이 되리라는 데 추호의 의심이 없었다. 그렇지만 지금 다시 읽어 보니 왠지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 안의 작은 목소리가 속삭였다. “남의 인생이라고 함부로 말하고 있군. 어떻게 돈 없이도 사랑만 있으면 행복하리라고 단언하는가? 수미는 네게 모든 것을 정직하게 다 털어놓았는데, 너도 지금 수미를 정직하게 대하고 있는가?”

자신 있게 ‘그렇다’고 답할 수 없었다. 그저 선생 체면상 교과서적인 답을 써놓았을 뿐, 수미의 딜레마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답했다고 말할 수 없었다.

사랑이냐, 돈이냐. 무슨 신파극 제목 같지만, 따지고 보면 사랑과 돈은 영원불멸의 인생 주제다. 선생으로서, 아니 인생 선배로서 수미에게 어떤 대답을 해 줄 수 있을까. 수미에게 자신 있게 말했듯이, 나는 정말 돈 없이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가?

나는 사는 데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수입이 있고, 그래서 돈에 초연하다. 아니, 내가 돈에 초연하다고 생각하기를 즐긴다. 그렇다고 무소유가 미덕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어차피 한세상 살다 가는 건데 이왕이면 편하게 많은 것을 누리며 살다 가고 싶다. 태풍을 걱정해야 하는 초라한 집보다 전망 좋고 큰 아파트에서 살고 싶고, 작은 경차보다는 번쩍이는 큰 차가 좋고, 분식집에서 라면을 먹기보다는 우아한 호텔에서 스테이크를 먹는 게 낫다. 나는 절대로 햇살 한 줄기에 만족하는 디오게네스가 될 수 없고, 또 그렇게 되고 싶지도 않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고, 이 세상에서 돈 있는 사람들은 죄를 지어도 감옥에 가지 않고, 돈이 있어야 병을 고치고, 돈이 있어야 공부를 하고, 미국 속담에 ‘빈 자루는 똑바로 서지 못 한다’는 말이 있듯이, 돈이 있어야 고개를 꼿꼿이 들고 자존심 내세우며 살 수 있다.

다시 수미를 생각한다. 돈에 살고 돈에 죽는 이 세상에서 앞문으로 들어오는 가난에 밀려 사랑이 옆문으로 새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

결국 나는 수미의 일기장을 돌려주기 전에 질문 하나를 덧붙였다. “한번 가정해 보자. 아주 돈이 많지만 사랑하지 않는 사람, 돈은 없지만 사랑하는 사람, 즉 돈 없는 사랑, 사랑 없는 돈 중에 어느 쪽을 택하겠니?”

물론 돈과 사랑, 둘 다 있으면 제일 좋겠지만 내가 살아 보니까 인생은 이것 아니면 저것, 선택일 뿐, 결코 ‘둘 다’가 아니다. 그리고 내가 수미라면, 나는 그래도 사랑 없는 돈보다는 돈 없는 사랑 쪽을 택할 것 같다.

장영희 서강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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