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천변풍경]<1>청계천 부활의 밤, 이덕무가 연암에게…

  • 입력 2005년 10월 4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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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이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1일 청계천 새물맞이 행사 이후 연일 수많은 사람이 새로 태어난 청계천을 보기 위해 몰려들고 있다. 청계천 복원을 계기로 소설가 김탁환 조경란 심상대 씨가 청계천을 소재로 쓴 엽편(葉篇)소설 ‘신(新) 천변풍경’을 4일, 10일, 17일에 잇달아 소개한다.》

맑은 내(淸溪) 따라 간들바람 오가는 밤입니다. 내내 건강하신지요. 연경(燕京·베이징) 지나 서국(西國·인도) 넘어 야소(耶蘇·예수)의 고향까지 주유하고 계신다는 소식 어제 초정(楚亭·박제가)에게 들었습니다. 길 위에서 만나고 깨닫고 미치고 되돌아보는 삶에 여전히 매혹되어 계시는군요. 세월이 가도 배움을 얻는 자세는 한결같은가 봅니다. 공맹(공자와 맹자)과 석씨(석가모니), 그리고 야소를 합쳐 놓은 것보다 더 크고 멋진 가르침 기대하겠습니다.

거북 등처럼 답답답답 맑은 내 가렸던 길 걷어내기로 했다는 서찰 예전에 올렸었지요. 그 내 위에 각양각색 스물두 다리가 제 모양 뽐내는 첫 밤입니다. 이 저녁만은 서책을 덮을까 합니다. 처음, 초발심, 첫인상 이런 말들의 부질없음을 깨달은 지 오래지만, 맑은 내에 대한 그리운 기억 더듬기 위해서는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네요.

운종가(雲從街·종로 거리)로 모여든 백성이 흘러 흘러 잔치판에 닿습니다. 저도 그 틈에 끼어 밤공기 마셔봅니다. 감(感)과 동(動)이 찾아듭니다. 만백성이 같은 마음, 같은 걸음으로 같은 곳을 향해 나아가기를 얼마나 치열하게 열망했던가요. 하나 우리들이 이 거리를 노닐 때는 단지 들뜬 바람으로만 그쳤습니다. 정조대왕께서 돌아가시자마자 그 바람은 한 줌 재로 한 방울 눈물과 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그 후로도 열망은 불씨처럼 되살아났지만 희망과 기쁨을 낳기보다 애통과 분노가 더 많이 쌓였지요.

1890년대 청계천 모습. 빨래하는 아낙들 옆에서 아이들이 멱을 감고 있다. 사진 출처 ‘사진으로 보는 근대한국’

내를 따라 오색 횃불 줄 잇고, 한성부 판윤(지금의 서울시장)을 비롯한 당상 당하(여러 관료) 얼굴에도 웃음꽃 가득합니다. 이만큼이나마 옛 모습 되찾은 걸 만족하는 듯도 합니다. 앞으로도 이들의 열망은 이루어질까요. 또 얼마나 많은 난관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까요.

잔치란 기쁜 것, 신나는 것, 행복한 것이겠지요. 이 밤 내내 먹고 마시고 노래 부르고 춤춘다 한들 탓할 일이 아닙니다. 하나 오늘이 단지 올바름으로 돌아가는 첫걸음에 지나지 않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맑은 내란 무엇입니까.

이 내에는 한숨과 고통, 걱정과 슬픔이 녹아 있습니다. 고달픈 세상살이 한탄하며 흘린 눈물과 나라님 벼슬아치들 탓하며 이 다리 저 골목에서 뱉은 침도 섞였습니다. 그 상처들 모여 고여 썩지 않고 쉼 없이 흐르기에 맑은 내지만, 맑음 그 자체를 위한 맑음은 결코 아니라는 가르침 저들도 아로새겼으면 하네요. 흐리고 탁한 모든 것 넉넉하게 품어 맑음으로 바꾸는 지혜를 배웠으면 합니다.

아, 눈 감으니, 맑은 내 따라 거닐던 백탑(白塔·원각사지 10층 석탑) 아래 벗들(북학파의 친구들) 떠오르네요.

일찍이 단원(檀園·김홍도)은 정조대왕의 명 받들어 맑은 내 주위를 맴돌며 빠르게 붓을 놀렸었지요. 아름답고 귀한 풍광 아니라 텁텁한 바람과 걸쭉한 육담, 경쾌한 아낙들의 빨랫방망이질과 뛰노는 아이들의 재잘거림 담았습니다. 탑전에서 그 그림 보시고, 전하께서 맑은 내를 거니신 적도 여러 번이었지요. 천하 민심을 살필 수 있는 곳이 바로 맑은 내였습니다.

담헌(湛軒·홍대용) 선생 철현금(鐵絃琴·현악기) 또한 맑은 내와 어울리면 더욱 낭랑했습니다. 대국 말로 풍아(風雅)를 읊으며 높은 듯 짧고 낮은 듯 길게 현을 켜면, 음률 전혀 모르는 천것도 그 자리에 앉고 컹컹 짖던 개들도 입을 다물었습니다. 소리와 가락은 물론 진중하고 우아하며 때론 화려했지만 그 속에 묻어나는 슬픔 또한 깊디깊었습니다. 소리만 고우면 무엇 하는가. 가락만 유장하면 무엇 하는가. 세상과 음률이 하나로 모이지 않는 시절을 탓하며 스스로 흥을 꺾어버린 곳도 바로 맑은 내였습니다.

초정이 물소 이마에 칼날 눈썹 치뜨고 울분 토하던 자리가 저기 영도교쯤이던가요. 영재(령齋·유득공)가 조련시킨 염주비둘기를 날리던 새벽, 계함(季涵·김영)과 나란히 누워 천문 논하던 밤, 아낙네들을 괴롭히던 포졸과 시비가 붙은 야뇌(野뇌·백동수)를 겨우 뜯어말리던 한낮, 수표교 다리 밑에 핀 꽃을 그리다가 내에 빠졌던 화광(花狂·김진)의 아침도 물론 잊을 수 없지만, 제게는 선생과 거닐던 8년 전 그 저물 무렵이 특별합니다.

발바닥에 온 마음을 집중하라 하셨지요. 내(川)가 우는 소리가 들리느냐고. 내를 울리는 나라 치고 번성하는 시절을 본 적 없다 하셨죠. 백성의 소리는 하늘의 소리일 뿐만 아니라 맑은 내의 소리이기도 하다 하셨습니다. 덮어버린다고 사라지지 않는다고, 어둠에 갇힐수록 울부짖음은 더 독하고 오래가는 법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딱딱하고 검은 도로만 내려다보며 어떤 말씀도 여쭙지 못했습니다. 많은 이가 업(業)을 잃고 더러 스스로 목숨까지 끊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 절망은 화려한 치장 아래 더욱 흉물스러운 얼굴로 숨어 지금도 도성의 밤을 앓고 있습니다.

그때, 선생은 지나가는 말로 “요즈음 것들은 풍류(風流)를 몰라”라고 하셨습니다.

풍류, 두 글자가 뒤통수를 치더군요. 힘들다고 꽁꽁 덮어두고 외면해서는 그 상처를, 빈익빈 부익부 양극화의 틈을, 두려움을, 한을 씻을 수 없습니다. 한바탕 벌여 놓고 신명나게 놀아 젖혀야 하는데, 젖줄인 맑은 내와 놀이마당인 다리가 땅에 꼭꼭 파묻혀 있었던 것이지요.

그 가르침 오늘 밤도 걸음걸음 새롭습니다. 저이들은 맑은 내와 더불어 많은 바람을 품겠지요. 백탑보다 높은 계획도 세울 겁니다. 저는 이 맑은 내에서 백탑파의 풍류가 살아나기를 바랍니다. 노래 부르되 담헌같이 아득하고 술 마시되 야뇌처럼 호탕하며 밤하늘 우러르되 계함처럼 예리하고 꽃나무 살피되 화광처럼 세심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이들이 일상의 고단함 잠시 내려놓고 함께 어우러져 도성의 낮과 밤을 즐기면서 푸른 인연 맺는다면, 그 기쁨은 연경 유리창에 처음 발을 디딜 때보다도 못하지 않을 겁니다.

어서 돌아오십시오. 모기 대가리만 한 글씨로 서책만 냅다 판다 놀리셨지만 저도 지금부턴 맑은 내에 발 담그고 다리 건너 귀밑머리 고운 여인에게 농(弄)도 붙이렵니다. 길 위에서 태어나고 스러지는 생(生)이 무엇인지 겨우 알았구나, 웃음 지어 보이실 날 기다립니다. 도성 안에서만 이렇듯 옛 풍류 찾아서야 어디 쓰겠습니까. 도성 아닌 곳 팔도강산 어디에나 명지바람 내내 불어야겠지요. 상처는 날려 버리고 고통은 떠안은 채 유유히 흘러가야겠지요.

적당한 자리에 엉덩이 붙이고 맑은 술 한 잔 쳐야겠습니다. 흥에 겨워 나온 이들 벗 삼아 대취하렵니다. 문득 취해 고개 숙이면 내에 비친 나약한 사내가 모처럼 함박웃음 짓겠군요. 그 사내에게도 역시 한 잔 따르겠습니다. 오래전 풍류에 젖은 선생께서 그리하셨던 것처럼.

▽이덕무와 박지원은▽

이덕무(李德懋)와 박지원(朴趾源)은 조선 후기 실학자로 북학파를 이루었다. 이덕무는 박학다식하여 약관에 박지원 유득공(柳得恭) 등과 교유했고, 박지원은 ‘열하일기’ 등의 저서를 남겼다.

●소설가 김탁환 씨는

―1968년생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동대학원 박사 과정 수료

―한남대 문예창작과 교수

―1996년 이후 ‘불멸의 이순신’ ‘압록강’ ‘허균, 최후의 19일’ ‘나, 황진이’ 등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들을 잇달아 발표

―2003년부터 ‘방각본 살인사건’ ‘열녀문의 비밀’ 등 조선시대 백탑파(북학파)가 등장하는 소설들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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