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천재 이창호⑧]바둑천재의 원동력

  • 입력 1998년 6월 26일 19시 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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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이창호(李昌鎬)9단은 전자오락실을 즐겨 찾았다. 실내를 뒤흔드는 폭발음, 모니터에 명멸하는 화염과 파괴의 잔상. 또래들이 누리는 일상의 즐거움과 떨어져 있어야 했던 소년은 이 시끄러움 속에서 오히려 편안함을 느꼈던 것일까.

하지만 오락실 주인들은 이 덩치 큰 소년이 반갑지 않았다. 동전 몇 개를 쥐고 오면 일어설 줄 몰랐다. 아군의 희생없이 전투를 계속하는 소년의 게임기에는 좀처럼 ‘게임을 계속하려면 동전을 다시 넣으세요’란 문자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

“새로 등장한 게임도 두세번 해보면 금새 ‘게임의 로직’을 파악하는 것 같았어요. ‘우리 편’이 안 죽는 법을 찾아내는 거예요. 더이상 돈 들 일이 없었지요.”

아마 유단자 A씨는 그를 ‘게임의 천재’라 부르고 싶은 모양이다.

컴퓨터 게임은 ‘예’와 ‘아니오’의 선택을 반복해나가는 연산구조로 돼있다. 이창호 소년은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가 갖출 수 있는 최상의 탁월한 감각과 감수성을 바탕으로 그 구조를 꿰뚫어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바둑은 흑과 백이 착점을 반복해 나가며 그 결과로 승패를 가리는 게임이다. 반상에 전개되는 2진법 게임이라고 할까. 단지 거액의 돈이 걸리는가, 아니면 식사비가 걸리는가에 따라 프로니 아마추어니 하는 구분만 있을 뿐.

바둑이란 게임에서 이창호 소년의 탁월한 감수성은 제대로 빛을 냈다. 수백년 이상 고수들이 축적해온 바둑의 정수를 그는 스폰지처럼 빨아 들였고 이내 승리와 상금을 거둬 들였다.

5번기 혹은 3번기로 우승상금을 가리는 결승전에서 이창호를 만나면 당대의 고수들도 심리적인 공황에 빠진다. 어딘지 찜찜한 불길함과 불편함에 쌓인다. 그것은 이9단이 한 판의 바둑 속에서도 상대를 금세 파악해내는 만큼 몇차례 대국을 거듭하는 장기전에서 그를 맞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상대의 논리구조, 그 연장선에서 드러나는 바둑의 구조를 파악하면 상대를 제압하는 것은 쉽다. 이창호의 바둑을 ‘기다리는 바둑’이라 하는 것도 바로 상대의 논리구조를 파악할 때까지 뜸을 들이는 스타일을 이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대체 그의 이같은 능력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인가.타고난 천재인가. ‘세계최강의 바둑’ 이9단 가족의 바둑실력이 궁금하다. ‘보통 사람들보다야 월등하게 세겠지.’하지만 부친 이재룡씨를 만나자 이런 짐작이 터무니없는 착각이었음이 곧 드러났다.

이9단은 전주 고향 집에 내려오면 가끔 부친과 한 판을 둔다. 시커멓게 13점을 깔고도 결과는 보나마나다. 적당히 봐주지 않는 모양이다. 부친에게 내린 이창호국수(國手)의 판정은 10급.

어린 손자를 일찍이 바둑세계로 이끌었지만 프로입단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조부는 ‘만년 9급’의 전형적인 동네바둑. 이9단의 형 광호(光鎬·26·건국대 의상디자인학과 4년)씨와 동생 영호(英鎬·22·인하대 전자계산학과 4년)씨도 바둑에 캄캄하다. 진외가(眞外家)와 외가, 8촌이내 직계를 다 뒤져봐도 이창호 9단의 가계에서 ‘큰 바둑’의 조짐을 찾기 어렵다. 이9단을 제외한 최강의 고수로 5,6급 실력의 백부가 꼽힐 정도이니 말이다.

따라서 혈통은 그의 오늘과 무관한 것 같다. 그렇다면 세상사람들이 ‘바둑 천재’로 부르는 이9단의 마력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지방에서 활동하는 프로기사 Y4단이 전하는 이야기.

어느날 새벽 지방에서 심야고속버스로 상경, 마땅히 갈 곳이 없어 서울 강남 고속버스터미널 부근 이9단의 집을 찾았다. 갑자기 나타난 선배기사를 맞으며 이9단은 슬그머니 바둑판을 방구석으로 치웠다. 한 눈에 훑어보니 전날 조훈현(曺薰鉉)9단과 둔 바둑이었다.

최강의 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기재(棋才)를 타고 났다거나 조기 교육등 좋은 환경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다른 어떤 누구보다 열심히 전력을 다해 밤샘 공부를 계속하는 자세가 없으면 안된다. 큰 물이 져 집채가 떠내려 가도 모를만큼 책 읽는데 몰두했던 어떤 선비의 말처럼 그는 집중했고, 또 집중하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 그를 지켜 보았던 한 교사는 “교실 밖만 멍하니 쳐다보곤 했는데 ‘커서 어떤 사람이 되겠나’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고 회고한다. 소년 이창호은 그 때 연무(煙霧)같은 속에서도 언뜻언뜻 보이는 다른 세계를 투시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조훈현9단의 내제자 시절 그가 5급 실력만 돼도 가능한 복기를 제대로 하지 못했던 일은 아직도 의혹에 쌓여 있다. 조9단은 ‘허 참, 내가 얘를 잘못봤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고 한다. 속세를 떠나버린 것 처럼 집요한 그의 ‘집중벽(集中癖)’을 감안해보면 이 점도 이해가 된다. 그 바둑을 둘 때 소년은 아마도 반상에 펼쳐지지 않은 다른 별세계의 바둑을 그리고 있었으리라.

그의 진지함과 집중력은 이미 세계정상 등극이란 결과로 검증되었으며 반상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상상력은 ‘이창호 신수 신형’이란 몇 권의 책이 나왔을만큼 넘치고 풍부하다. 최근 이9단이 예전보다 많이 구사하는 모험 가득찬 수는 깊은 새벽의 깨달음이 주는 즐거움을 아는 이가 드러내는 당당함일 것이다.

〈조헌주기자〉hans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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