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338>숲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1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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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하(1937∼)

밤새 격렬하게 싸우다 달아난 애인을 뒤쫓아 숲까지 갔더니
웬 녀석이 사과궤짝까지 들고 와 새벽부터 웅변연습을 하고 있다.
구케의원이라도 돼 또 나라를 말아먹으려나 싶어 야리다 보니
한 옆에는 낯짝 우두바싸고 세상의 고뇌란 고뇌는 혼자 짊어진 듯이
신음소리를 내는 녀석까지 보인다.

하지만 고요한 바다와 푸른 나무로 에워싸인 숲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쫓던 애인도 잊고 나는 무슨 생각에 잠긴 말 곁으로 다가간다.
야채와 당근을 먹을 만큼 먹은 듯 말은
호주에 가 있는 짝이라도 생각하는 것 같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그렇게 받아들일 밖에 없다.      
         

여자나 남자나 성정이 불같은 연인들일 테다. 사랑할 때만큼이나 싸울 때도 격정적이어서, ‘밤새 격렬하게 싸우다’ 급기야 애인이 뛰쳐나간다. 아직 어두운데 나가긴 어딜 나간단 말이냐. 걱정도 되고 해서 화자는 ‘애인을 뒤쫓아 숲까지’ 간다. 숲은 일상공간이 아니기 때문에 뭔가 낯선 것들이 거기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예로부터 숲은 시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해왔다. 그런데 화자는 애인을 찾으러 숲에 갔다가 이런저런 기이한 세상 풍경을 본다. 아무도 없을 것 같은 새벽 숲에서 ‘정치인’도 보고 ‘철학자’도 보고 말도 본다. 말은 이제하의 상징동물이니 ‘시인’이라고 생각해도 될 테다. ‘우두바싸고’는 피난 보따리 싸듯 감당 못하게 담아 싼다는 뜻이다. ‘정치인’ 흉내 내는 놈과 ‘철학자’ 흉내 내는 놈에 대한 야유에 찬 묘사가 ‘푸른 나무로 에워싸인’ 바닷가 숲의 아름다움과 대비돼 더욱 우스꽝스럽다.

시의 배경이 된 공간은 제주도가 아닐까? 여행지에서도 독하게 싸운 그 애인은 어디서 분을 삭이거나 후회하고 있을까. 맨몸으로 뛰쳐나갔을 테니 혼자 공항에 가 있지는 않을 테다. ‘쫓던 애인도 잊고’ 화자는 ‘무슨 생각에 잠긴 말 곁으로 다가간다’. ‘야채와 당근을 먹을 만큼 먹은 듯 말은/호주에 가 있는 짝이라도 생각하는 것 같’단다. 말은 시선을 아득히, 동이 틀락 말락 한 수평선 너머로 두고 있을 테다. 차분해진 화자도 아득히 바다를 바라보며 생각한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그렇게 받아들일 밖에 없다’고. 참으로 감수성이 안 늙는 시인 이제하!

황인숙 시인
#숲#애인#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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