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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1969년 강릉발 대한항공 여객기 납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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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1969년 강릉발 대한항공 여객기 납치

동아일보입력 2013-05-24 03:00수정 2013-05-24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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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33>주한미군 7사단 철수
1971년 3월 27일 주한 미 제7사단 고별식에서 훈장을 주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 박 대통령은 이날 1945년 9월 8일 한국에 온 후 6·25전쟁을 거치며 대한민국을 지켰던 7사단 미군들에게 치하와 희생자에 대한 애도의 뜻을 표했다. 미 7사단은 4월 2일 부대 창설 54년 만에 퇴역 해체된다. 도서출판 기파랑 제공
2005년 사회과학연구지에 발표한 ‘유신체제 수립 원인에 관한 재조명’이란 제목의 논문을 쓴 신종대 씨(경남대 북한대학원)는 71년 당시 안보 불안에 대한 전 국민적 공감대가 있었음을 자세히 지적하고 있다.

68년 1·21 청와대 기습과 이틀 후 푸에블로호 납치 만행을 저지른 북한은 10월 30일 120명의 무장공비를 경북 울진과 강원 삼척에 침투시켰으며 12월 9일에는 강원 평창군 진부면 가정집으로 들어가 이승복 어린이와 그의 모친, 남동생, 여동생을 참혹하게 살해하고 형과 아버지를 크게 다치게 한다. (12월 11일자 조선일보는 이 사건을 ‘공산당이 싫어요, 어린 항거 입 찢어’라는 제목으로 크게 다뤘으나 미디어오늘, 언론개혁시민연대 등이 “작문”이라고 주장하는 등 왜곡 조작 시비를 걸었다가 대법원이 2006년 11월 “진실”이라고 판결함으로써 마무리됐다.)

이듬해인 69년에도 3월(주문진) 5월(전방사단) 6월(부안)에 무장간첩을 잇따라 침투시킨 북한은 12월 11일엔 승객과 승무원 등 51명을 태우고 강릉을 출발해 서울로 가던 대한항공(KAL) 여객기를 납치해 국민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북한은 납치 66일 만인 1970년 2월 14일 승객 39명만 판문점을 통해 돌려보냈을 뿐 12명(승무원 4, 승객 8명)의 송환은 아직도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흔히 칼(KAL)기 납치하면 ‘김현희 사건’(87년)을 떠올리지만 이미 69년에도 납치가 있었으니 새삼 전율이 느껴진다.

칼(KAL)기 피납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인 70년 3월 31일에는 일본 적군파 요원이 하네다 공항을 출발해 후쿠오카로 향하던 일본항공 요도호를 납치해 북한으로 망명한 요도호 납치 사건이 일어난다. 다시 2개월여 뒤인 6월 5일에는 연평도 부근 공해상에서 우리 해군 함정이 납치된다. 언론에는 ‘방송선’이라고 알려졌지만 당시 해군 함정은 어선단을 보호하는 임무를 하고 있던 어엿한 ‘120t급 전투용 포함(砲艦)’이었다.

광복 후 처음이었던 해군 선박 피랍 며칠 뒤인 70년 6월 22일에는 1·21 청와대 기습에 이은 박정희 대통령 암살 시도가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일어난다. 오전 3시 50분경 북한 무장특공대 2명이 현충원 안에 잠입해 현충문 위에 폭탄을 장치하려다 실수로 폭탄이 폭발한 것. 이 중 1명은 피투성이 시체가 됐고, 1명은 추격전 끝에 사살됐다. 이들은 며칠 뒤 있을 6·25전쟁 기념식에 참석할 박 대통령과 정부 요인들을 암살하기 위해 폭약을 장치한 후 200∼300m 떨어진 곳에서 무선 기폭장치로 폭발시키려 했다.

이듬해 71년 1월에도 대한항공 소속 F-27 항공기 납치 미수사건이 일어났다. 북한 공작원은 사살되고 공작원이 떨어뜨린 포탄을 몸으로 막은 조종사가 숨졌다. 3년 뒤인 74년 8·15 기념식에서는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의 총탄에 숨지고 83년 10월 9일에는 아웅산 테러가 일어나니 국민들 입장에서는 “6·25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불안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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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움직임이나 국제 정세는 결코 남한에 유리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미국은 1·21 청와대 기습사건 때에도 북한에 유화책을 쓰는 한편으로 남한에 대해서는 ‘맹방이 맞나’ 싶을 정도로 한국군의 단독 행동을 강경하게 막았다. 69년 7월엔 “아시아 국가 안보는 아시아인들이”를 주장하며 아시아 주둔 미 지상군의 단계적 철수를 골자로 한 닉슨 대통령의 ‘괌 독트린’이 나온다. 이 조치가 발표된 지 1년 만인 70년 3월 미국은 한국에 주한미군 보병 7사단 2만여 명을 철수하겠다고 공식 통보한다.

‘현충문 사건’ 2주 만에 나온 미국의 통보에 박 대통령은 8월 3일 주한 미대사 및 주한 미군사령관과 가진 간담회에서 “향후 몇 년간이 한국 안보에 매우 중요한 시기이므로 재고해 달라”고 했다. 8월 24일 미 부통령 애그뉴가 특사 자격으로 한국을 찾았다.

박 대통령은 “2주간 거의 모든 일정을 미루고 대책 마련에 골몰했다”(김정렴 회고록)고 할 정도로 절박하게 이 회담에 매달렸다. 당시 애그뉴 부통령을 수행했던 미국 수행원에 따르면 “회담에서 박 대통령이 보여준 행동은 내가 지금까지 목격한 어떠한 것과도 견줄 수 없는 ‘절대적으로 공격적인’ 국가원수의 행동이었다”(미 하원 소위원회 자료)고 한다. 하지만 7사단 철수는 뒤집어지지 않았다.

박 대통령은 철수를 받아들이는 대신에 미국 측으로부터 한국군 장비를 현대화하고 군사 원조를 해주며 2만 명 이상 감군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나 애그뉴 부통령은 회담을 마치고 대만으로 향하면서 미국 기자단에게 “5년 이내에 주한미군은 완전히 철수할 것”이라고 해 한국을 다시 당황하고 불안하게 만들었다(미 하원 소위원회).

한편 71년 7월 15일 닉슨 대통령은 키신저 국무장관의 방중(訪中·7월 9∼11일)과 자신의 1972년 2월 방중 계획을 밝혀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는 남한의 안보 불안을 더 부추기는 일이었다. 돈 오버도퍼의 ‘두개의 코리아’(1998년)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미국이 한국에 알려주지도 않고 중국과 손을 잡았다는 사실에 미국을 더이상 신뢰할 수 있을까 우려했다”고 전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향후 미-중 비밀 협상에서 중국이 주한 미군 완전 철수를 요구할 경우 미국이 수용하지 않을까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국민들도 향토예비군 설치나 학생 군사훈련(교련) 실시 등 ‘병영 국가적 동원’에 대한 불가피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71년 4월 대선에서도 국민들이 박 대통령을 지지한 밑바탕에는 ‘북괴의 야욕 앞에 누가 이 안정된 생활을 지켜줄 것인가’를 내건 슬로건에 대한 지지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대선 과정에서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가 제기했던 4대국 보장론(미-일-중-소 4대국이 보장하는 한반도 전쟁억제 보장책)은 당시로선 시대를 앞서간 통일정책이긴 했지만 그가 내건 또 다른 공약인 향토예비군 및 학생교련 폐지 등에 대한 국민 여론은 좀 달랐다. “김 후보의 주장이 힘을 얻을 경우 안보태세 해이로 북한의 전면도발을 자초할 수 있다”는 박 대통령의 주장에 국민들이 더 공감했다고 할 수 있다.

어떻든, 박 대통령은 안보에 대한 전반적 위기의식을 71년 말 비상사태선포와 72년 ‘유신헌법’의 명분으로 내세운다.

미국 소련 중국 등 주변 강대국들의 입장 변화, 주한미군 철수, 북한의 계속된 도발 등 안보정세는 분명 크게 변화하고 있었다. 당시 대한민국의 국격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낮았으니 한국에 불리한 국제정세는 박 대통령과 국민들에게 걱정을 넘어 공포와 두려움을 주었으리라 짐작된다.

여기에 국내적으로는 사법파동, 서울대 교수들을 필두로 한 전국 대학교수들의 학원자주화 선언(8월), 교련 반대를 내건 학생들의 시위, ‘광주대단지’ 사건 등이 동시다발로 터지면서 71년 내내 박 정권은 분명 위기 국면으로 향하고 있었다. 박 대통령으로서는 뭔가 비상한 수단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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