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허승호]가이사의 것, 하나님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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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2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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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운하 사업 논란이 거셌던 현 정부 출범 초기 기자의 직책은 경제부장이었다. 이 사안에 관한 편집국의 주무 부장이었던 것이다. 당시 기자는 대운하 사업에 회의적이었다. 그때 이와 관련한 동아일보 기사의 논리 구조는 이랬다.

대운하 사업과 4대강 사업

‘대운하는 운송물류 시스템에 관한 투자다. 본질적으로 경제사업이다. 비용-편익 분석에서 타당성이 입증돼야 한다. 현재 정부의 장밋빛 전망에도 불구하고 비용-편익 비율에 대한 의구심이 많다. 원래 투자타당성 분석은 정부가 아니라 민간이 전문이다. 정부가 꼭 대운하 사업을 하고 싶다면 국민에게 부담 지우지 말고 민간컨소시엄에 투자를 맡겨라. 그리고 운하 건설 후 운용하면서 손실이 나든 이익이 나든 투자자가 전적으로 책임지게 하라. 손실보전계약 같은 것은 해주지 마라. 이 조건으로 사업을 하겠다는 민간투자자가 없으면 그것은 사업성이 없다는 뜻이다.’

우여곡절 끝에 대운하 사업은 철회됐고 그 대신 4대강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4대강에 대해 기자는 지금껏 ‘직업인으로서의 판단’을 유보하고 있다. 4대강은 비즈니스가 아니라 치수 및 수질, 환경정비에 관한 사업이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대운하가 옆 가게를 인수해 사업을 확장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일이라면 4대강은 내 집을 새로 단장할 것인지, 단장한다면 도배를 할 것인지 페인트칠을 할 것인지를 판단하는 문제다. 전자는 비용보다 편익이 커야 하지만 후자는 선호에 따른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4대강 예산을 줄여 다른 일에 써야 한다’는 주장은 ‘집 도배에 쓸 돈으로 반찬거리를 더 사자’는 말과 비슷해 옳고 그름을 가리기 힘들다. 야당이 그런 생각이라면 그 주장을 펴 국민을 설득하고 반대여론을 형성하면 되는 일이다.

정부 정책을 이런 식으로 판단·평가해온 기자는 최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원색적인 어투로 4대강에 반대하는 것을 보고 사뭇 놀랐다. 사제들이 이 문제에 전문 식견이 얼마나 있을지 궁금했고, 설혹 학습을 거쳐 어느 정도 배경지식을 갖췄다 해도 이견(異見)에 대해 거의 막말을 써가며 비난성명을 내는 것이 적절한가 하는 생각도 했다.

솔직히 말하자. 신문기자로 청춘을 보낸 필자의 감각으로는 4대강 사업에 대한 반대가 환경에 대한 순수한 관심으로 보이지 않는다. MB정부에 대한 반감의 함량이 더 크다는 생각이다. 누가 “정치색은 없다”고 주장한다면 거짓말쟁이라 치부할 것이다. “정부가 돈을 들여 환경을 망치려 한다”는 식의 얘기 앞에서는 그냥 어처구니가 없다.

교회가 무모하게 영역을 확장한 시대도 있었다. 그러나 교회가 종교 이외의 분야에 개입하면 폐해가 크다. 중세 암흑시대가 그 사례로 당시 대표적인 과오가 갈릴레이의 지동설 탄압이었다.

政敎분리는 열린사회의 기본원리

물론 종교가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할 때도 있다. 예컨대 정통성 없는 정권의 폭압적 통치로 시민의 인권과 인간의 존엄이 짓밟힐 때 사제들은 감연히 발언했다. 교회에 대한 국민의 존경도 두터웠다. 하지만 그런 극단적 상황이 아니라면 정교(政敎)분리라는 열린사회의 기본원칙은 지켜져야 한다.

성경에 이런 대목이 있다. “율법주의자들이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물었다. 가이사(카이사르·Caesar, 당시 로마 황제의 칭호)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그릅니까? 예수가 말했다. 세금 낼 은화에 뉘 얼굴 뉘 이름이 새겨져 있느냐? 답하길 가이사입니다. 예수가 가르쳤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태복음 22장 15∼22절)

세속의 일과 하나님의 일을 뒤섞지 말라는 주님의 가르침이다. 주일학교에서 배운 단순하고 기초적인 교리다. 이와 다른 해석도 있는가?

허승호 편집국 부국장 tige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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