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균 칼럼]보수가 무너져도 아닌 건 아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4월 3일 03시 00분


코멘트

반기문 주변 후회 기류 감지돼… 그래도 回軍은 한번 더 죽는 길
킹메이커가 ‘킹’ 되려는 김종인… 虛舟 ‘빈배 정신’ 배웠으면
승복 정신 잃은 박근혜의 비극… 존엄 잃은 보수엔 기회 안 와

박제균 논설실장
박제균 논설실장
한국 정치에서 직전 대통령 선거의 2위는 엄청난 정치적 자산이다.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이 직전 대선의 2위였다. 박근혜 전 대통령도 사실상 본선이었던 2007년 한나라당 경선에서 2위를 하고 대통령이 됐다. 2012년 대선 2위였던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이번 대선에서 지지율 1위를 달린다. 당시 야권 후보 자리를 놓고 문 전 대표와 사실상 단일화를 한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가 지지율 2위로 부상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여기엔 여러 함의(含意)가 있다. 한국 유권자의 투표 성향이 대체로 관성(慣性)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변화를 바라면서도 한번 지지했던 후보는 잘 바꾸려 하지 않는다. 또 ‘대권 재수’에 관대하다는 의미다. 재수 후보 또한 대선에서 석패(惜敗)하면서 금쪽같은 ‘대권 노하우’에 접할 기회를 가졌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지금 아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요즘 누구보다 땅을 치고 후회할 사람은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일지 모른다. 반 전 총장이 중도하차하지 않고 지금까지 대선 주자에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면 어땠을까. 문 전 대표와 자웅을 겨루는 유력 주자가 됐을 것이라고 나는 본다.

실제 반 전 총장 주변에선 강한 후회의 기류가 감지된다. 반 전 총장이 미국으로의 출국을 연기한 것도 이런 기류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때를 놓칠세라 안 전 대표 측에서 ‘반기문 외교특사 영입’ 카드를 던졌다. 문 전 대표에 앞서 반기문이라는, 철은 지났지만 명품 이미지 상품에 먼저 침을 발라놓는 동시에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반 전 총장의 회군(回軍) 통로를 막는 다목적 카드다.

아무리 그래도 아닌 건 아니다. 반 전 총장이 다시 대선판에 돌아오려 한다면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의 대선 출마만큼이나 명분 없는 일이다. 황 권한대행은 사석에서 ‘대통령 코스프레’를 한다는 오해를 받기가 싫어서 방탄차를 타지 않는다고 털어놓았다. ‘군 통수권자가 그러면 되느냐’는 질문에 “총 맞지 뭐…”라고 농을 했다가 “우리나라는 그렇게 총 쏘기 쉬운 나라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불출마 선언으로 대통령 코스프레 논란이 사라진 지금은 방탄차를 타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보수 유권자들은 반기문의 경륜과 황교안의 대쪽 성품이 아쉽다. 그래도 번복은 안 된다. 정치를 희화화(戱畵化)할뿐더러 보수가 한 번 더 죽는 길이다.

공동화(空洞化)된 보수 표심을 노려 곁불을 쬐려는 사람들도 있다. 좌우 진영을 3번이나 넘나들었던 김종인 전 민주당 대표(77)가 이번에는 ‘킹메이커’와 ‘킹’ 사이를 넘나들고 있다. 보수층의 ‘문재인포비아’에 기대어 보수·중도를 엮어내면 킹도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듯하다.

김종인의 정치판을 읽는 탁월한 능력과 국정 경험을 존중한다. 그러나 킹메이커와 킹은 다르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참여 전력(前歷)에 뇌물죄 유죄 판결까지 받은 분이 나설 때와 안 나설 때를 가렸으면 한다. 탁월한 킹메이커였으되, 대권에는 철저하게 선을 그었던 허주(虛舟·김윤환 전 신한국당 대표)의 ‘빈 배 정신’을 배웠으면 한다.

김종인과 ‘제3지대’ 후보 단일화를 추진한다는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장(71)은 또 어떤가. 2007년 대선부터 출마를 저울질하더니 이번에도 다시 나타나 별 관심도 끌지 못하는 단일화를 추진하고 있다. 여기에 가벼운 언행은 접어두더라도 대법원 판결을 남겨둔 홍준표 경남도지사가 원내 2당(93석)인 자유한국당의 대선 후보로 선출됐다. 많은 보수 유권자들이 허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대선 운동장이 아무리 기울었어도, 보수 쪽에 쓸 만한 선수가 보이지 않아도 게임은 공정하게 치러야 한다. 2007년 8월 한나라당 경선에서 박근혜는 선거인단 선거에서 이기고도 여론조사에서 밀려 이명박에게 대선 후보 자리를 내줬다. 그러고도 즉각 “경선 결과에 깨끗이 승복한다”고 선언해 큰 울림을 남겼다.

이 승복이야말로 그 뒤 연달아 두 개의 보수정권을 여는 정치적 맹아(萌芽)가 됐다. 오늘날 박 전 대통령의 비극은 객관적 사실을 합리적으로 받아들이는, 바로 그 승복의 정신을 잃어버린 데서 비롯됐다. 보수도 설령 대선에서 패할지언정 마지막 존엄마저 잃어버린다면 다신 기회가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박제균 논설실장 phark@donga.com
#직전 대통령 선거의 2위#반기문#김종인#보수정권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