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진호 어문기자의 말글 나들이]엄한 사람, 애먼 사람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7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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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호 어문기자
손진호 어문기자
“늙은이 욕심이 과했다. 앞으로 너희들 결혼 얘기 안 할 테니 ‘엄한 짓’ 하지 마라.”

“‘엄한 애’ 데려오면 어쩌죠.”

‘착한 드라마’라는 호평을 받고 있는 TV 주말극 ‘기분 좋은 날’의 한 장면이다.

이 드라마에서 심심찮게 등장하는 ‘엄한 짓’ ‘엄한 애’ 등 ‘엄하다’는 말이 언중을 헷갈리게 한다. 우리말과 글 좀 안다는 사람일수록 더 그럴 것이다. 왜일까. 극 중에서 사용한 ‘엄한’은 ‘엉뚱한’이라는 뜻으로 쓴 게 분명한데, 어떤 사전에서도 근거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엄(嚴)하다’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사전은 ‘엄하다’에 대해 ‘규율이나 규칙을 적용하거나 예절을 가르치는 것이 철저하다’라고만 설명할 뿐이다.

그렇다면 ‘엄한’의 정체는 무엇일까. 바로 ‘애먼’이란 고유어를 잘못 알고 쓴 것이다. ‘애먼’은 ‘일의 결과가 다른 데로 돌아가 엉뚱하게 느껴진다’는 순우리말이다. 물론 표제어로도 올라 있다. ‘아무 잘못 없이 꾸중을 듣거나 벌을 받아 억울하다’란 순우리말 ‘애매하다’에서 나왔다. ‘애매하다’가 줄어 ‘앰하다’가 되고, 여기서 관형사 ‘애먼’이 나온 것이다.

듣다 보니 또 다른 의문이 든다. ‘애매하다’가 ‘억울하다’는 뜻이라고? 한자어와 순우리말이 뜻은 다른데 발음이 같다 보니 오는 혼란이다. ‘희미하여 분명하지 않다’란 한자어 ‘애매(曖昧)하다’와 ‘억울하다’는 순우리말 ‘애매하다’는 구별해서 써야 한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며칠 전 독자 한 분이 명쾌한 해답을 줬다. 한자어 ‘애매하다’와 ‘애매모호하다’를 ‘모호하다’로 쓰면 헷갈릴 일이 없다고 했다.

이런 연유로 우리가 흔히 쓰는 ‘엄한 사람 잡지 마라’ ‘엄한 짓 하지 마라’는 ‘애먼 사람 잡지 마라’ ‘애먼 짓 하지 마라’가 사전적으로는 바른 표현이다. 하지만 열에 아홉이 ‘엄한 사람’ ‘엄한 짓’을 바른 표현으로 알고 있는 ‘엄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어원이 분명함에도 입말의 자리를 빼앗긴 ‘애먼’으로선 억울하기 짝이 없지만 어쩌랴. 말의 시장에서 누굴 죽이고 살리느냐를 결정하는 건 오로지 언중뿐이다. 그러니 ‘엄하다’를 표준어로 대접해야 할 때가 올지도 모르겠다.

알콩달콩 사랑을 키워가는 극 중 서재우와 정다정의 사랑이야기는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 제발 ‘엄한 결말’로나 끝나지 말아야 할 텐데….

손진호 어문기자 songbak@donga.com
#엄하다#애먼#애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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