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홍수용]강봉균 “무엇이라도 하라”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2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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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봉균 전 재정경제부 장관은 바둑을 좋아했지만 고수는 아니었다. 친구이자 동료였던 이영탁 세계미래포럼 이사장이 “두 점 깔아주겠다”고 해도 유혹에 넘어간 적이 없다. 번번이 지면서도 동등한 조건의 바둑만 고집했다. 경제기획원 재직 당시 주 7일 근무에 퇴근시간이 밤 12시를 넘기 일쑤였던 강봉균은 취미생활도 일처럼 했다. 3선 의원이던 그를 정치인이 아닌 관료로 본 것은 국회에서는 보기 힘든 원칙주의자였기 때문이다.

 ▷1997년 외환위기 직후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은 원-달러 환율이 치솟았으니 돌멩이도 수출할 수 있을 정도라며 정부 지원을 요청했지만 강봉균 당시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은 거절했다. 강봉균은 김 회장이 시장경제의 원칙과 다른 길을 가려 한다고 봤다. 한국개발연구원이 펴낸 ‘코리안 미러클 4: 외환위기의 파고를 넘어’에서 강봉균은 “나는 대우그룹이 무너진 것이 (김우중 회장의) 1인 경영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김대중 정부의 재벌개혁은 경제위기라는 절박한 환경을 강봉균 같은 관료가 적절히 활용한 성과였다.

 ▷그에게 췌장암이 발병한 건 3년 전이었다. 2015년까지만 해도 수술 경과가 좋았다. 그러나 지난해 4·13총선 전 새누리당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을 때는 췌장암이 재발한 상태였다. 쉬어야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몰락하는 여당을 살리는 구원투수라는 임무에 너무 충실했던 걸까. 1969년 서울대 상과대를 졸업한 친구들의 모임인 ‘69 상우회’ 멤버 10인은 친구의 얼굴이 검게 변하는 걸 두려운 마음으로 지켜봐야 했다. 몸에 암세포가 퍼지는 속도만큼이나 강봉균표 정책도 빠르게 쏟아졌다. 그는 끝까지 아이디어가 풍부한 ‘꾀주머니’였다.


 ▷지난해 투병 중이던 강 전 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총선 당시 ‘한국판 양적완화’라는 초유의 정책을 추진한 배경을 물었다. “무엇이라도 해야 했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대답이다. 외환위기 극복의 사령탑이었던 그가 1월 31일 세상을 떠났다. 공직자들이 ‘무엇이라도 하라’는 일벌레 선배의 조언을 유언으로 듣기 바란다.

홍수용 논설위원 legman@donga.com
#강봉균#한국판 양적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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