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370>은는이가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2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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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는이가 ―정끝별(1964∼ )

당신은 당신 뒤에 ‘이(가)’를 붙이기 좋아하고
나는 내 뒤에 ‘은(는)’을 붙이기 좋아한다
당신은 내‘가’ 하며 힘을 빼 한 발 물러서고
나는 나‘는’ 하며 힘을 넣어 한 발 앞선다
강‘이’ 하면서 강을 따라 출렁출렁 달려가고
강‘은’ 하면서 달려가는 강을 불러세우듯
구름이나 바람에게도 그러하고
산‘이’ 하면서 산을 풀어놓고
산‘은’ 하면서 산을 주저앉히듯
꽃과 나무와 꿈과 마음에게도 그러하다
당신은 사랑‘이’ 하면서 바람에 말을 걸고
나는 사랑‘은’ 하면서 바람을 가둔다
안 보면서 보는 당신은 ‘이(가)’로 세상과 놀고
보면서 안 보는 나는 ‘은(는)’으로 세상을 잰다
당신의 혀끝은 멀리 달아나려는 원심력이고
내 혀끝은 가까이 닿으려는 구심력이다
그러니 입술이여, 두 혀를 섞어다오
비문(非文)의 사랑을 완성해다오

‘이(가)’는 주격조사고 ‘은(는)’은 격조사가 아니라 보조사(補助詞)다. 예컨대 ‘나는 너는 사랑하지만 걔는 사랑하지 않아’에서 ‘너는’과 ‘걔는’의 ‘는’은 ‘너를’과 ‘걔를’의 ‘를’이라는 목적격을 대신한다. 그런데 대개 ‘나는’의 ‘는’처럼 주격조사 자리에 들어가서 쓰인다. 이때의 ‘은(는)’은 화제(話題)를 나타낸다. 다시 말해 ‘나는’은 ‘나에 대해서 말하자면’이란 뜻이다. 주격조사 자리에 있는 보조사와 주격조사의 구별이 한국인에게는 아주 쉬운데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에게는 어렵다고 한다. 한국인에겐 ‘은는이가’의 문법이 내면화되어 있어서 ‘은(는)’을 쓸 때와 ‘이(가)’를 쓸 때를 잘 구별하지만, ‘전철이 곧 들어옵니다’라는 지하철 안내방송을 ‘전철은 곧 들어옵니다’라고 하면 안 되는 걸까, 고개를 갸웃거리는 외국인도 있을 테다.

이 시가 담긴 시집 ‘은는이가’를 일독한 감상은 한마디로 정끝별 시가 한창 물이 올랐다는 것이다. 뜻은 웅숭깊고 형상은 무르익었다 할까. 첩첩 겹겹으로 말을 쌓는 ‘말발’은 여일하고, 거기 어떤 단심(丹心)이 표표히 아리땁게도 나부낀다. 죽음을 아우르는 생, 그리고 시에 대한 단심이리라. 조사 ‘은는’과 ‘이가’가 지니고 있는 느낌, 그리고 용법 차이를 절묘하게 묘사해 서정적 아치마저 아로새긴 이 시의 ‘당신’과 ‘나’는 둘 다 시인 자신일 테다.

황인숙 시인
#은는이가#정끝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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