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숙이 말하는 몸과 우주]<2>의사 대 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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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3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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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만 보고 말하는 의사… 환자 얼굴도 좀 봐주세요

곳곳마다 대형병원이고 도처에 약국과 보건소다.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 주는 정신과와 심리상담소도 사방에 즐비하다. 그뿐인가. 미디어마다 건강과 병리에 대한 이야기를 매일같이 쏟아낸다. 그런데 결론은 늘 동일하다. 조기검진, 그리고 전문가와의 상담! 그래서 현대인들은 검진에 심혈을 기울인다. 위내시경에 장내시경, MRI, fMRI 등 첨단장비들에 기꺼이 몸을 내맡긴다. 헌데, 참 이상하다. 그렇게 검진을 많이 하는데도, 전문가가 이렇게 늘어나는데도 병은 줄어들기는커녕 계속해서 새로운 병들이 탄생한다. 또 우울증은 범국민적 질병이 됐다. 참, ‘우울한’ 노릇이다.

하지만 진짜 우울한 일은 따로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몸을 스스로 탐구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아프면 곧바로 병원으로 달려간다. 그 다음, 각종 검사를 받는다. 좋은 병원일수록 신체를 아주 정교하게 분할한다. 동시에 체크해야 할 항목들이 엄청나다. 이 세련되고 복잡한 과정을 거친 뒤라야 비로소 의사와 마주 앉는다. 하지만 의사는 환자를 보지 않는다. 모니터에 떠 있는 각종 데이터를 읽을 뿐이다. “제발 제 얼굴 좀 보고 이야기해 주세요!” 암에 걸려서 오랫동안 치료를 받았던 한 환자의 절규다. 처방은 수술 아니면 약. 병의 장소를 제거하거나 아니면 세균을 박멸하거나. 그리고 끝이다.

보다시피 이 배치는 몹시 불평등하다. 먼저 병원에 들어가는 순간, 환자의 몸은 분과별로 파편화된다. 몸 전체를 통째로 볼 수 있는 프레임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음, 의사 앞에서 환자는 어떤 발언권도 없다. 그저 병증을 호소하고 의사의 처분을 기다리는 순한 양일 뿐이다. 의사가 교사라면, 환자는 학생이다. 심지어 의사는 사제요, 환자는 죄인이다. 더할 나위 없이 계몽적이고 또 파쇼적이다. 정치 경제적 차원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면 다들 격렬하게 저항할 것이다. 그런데 병원에선 어째서 이런 식의 ‘파시즘’을 기꺼이 용납하는 것일까?

그것은 결정적으로 ‘앎의 권리’로부터 기인한다. 환자는 병에 대해 어떤 앎도 없다. 아니, 앎의 의지조차 없다. 그건 어디까지나 과학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과학은 우리 시대의 주술이다. 무당의 주술과 다른 점이 있다면, 과학은 각종 수치로 이뤄져 있다는 것뿐이다. 오진율 및 근거가 희박한 정황들, 맹목적 의존성 등의 측면에선 전적으로 동일하다. 또 하나, 현대의학에서 치유란 질병을 몰아내는 것, 곧 전쟁 모델에 입각해 있다. 전쟁을 치르려면? 돈이 든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각한다. 병들지 않으려면, 건강하게 오래 살려면 돈이 필요하다고. 자본과 과학의 견고한 유착!

이런 배치하에선 의학이 진보할수록 ‘계몽의 파시즘’은 강화될 수밖에 없다. 환자는 더욱 무지해질 것이고, 의사는 더 한층 군림하게 될 테니까. 의학은 원래 그런 게 아니냐고? 천만에! 그것은 의학의 본래 면목과 가장 동떨어진 모습이다. “널리 의학을 밝혀 집집마다 의학을 알고 사람마다 병을 알게 된 연후라야 가히 장수하게 될 것이다.”(동의수세보원) 사상의학을 창시한 이제마의 전언이다. 그렇다! 문제는 앎이다. 앎이 곧 주권이자 평등의 원천이다.

고미숙 고전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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