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권순택]사회적 동정 악용하는 ‘희망버스’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8월 29일 2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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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택 논설위원
권순택 논설위원
서울에서 열린 제4차 ‘희망버스’ 행사의 참가 규모나 열기를 보면 희망버스의 열기도 식어가는 듯하다. 한진중공업에서 8개월째 농성 중인 김진숙 씨는 이제 크레인에서 내려올 수도, 무한정 고공농성을 계속할 수도 없는 난감한 처지에 놓인 것 같다.

김 씨는 가난 때문에 중학교 졸업 후 가출해 1981년 한진중공업 전신인 대한조선공사 용접공이 된 뒤 방송통신고에 가려고 했다. 재직증명서를 떼러 간 그에게 회사 대리는 “방통고 나온다고 니 인생에 꽃이 필 것 같나”라며 거부했다. 그의 책을 읽으면서 글재주에 놀랐다. 그가 방통고를 거쳐 대학에 갔다면 시인이나 소설가가 됐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물여섯에 해고된 뒤 세 번의 남영동 대공분실 조사, 두 번의 구속과 수배생활 5년이란 그의 이력도 달라졌을지 모른다.

종북(從北)도 좌파도 아니면서 제 돈 들여 ‘희망버스’에 탄 사람 중에 김 씨의 기구한 인생 스토리에 사회적 동정(social sympathy)을 느낀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나도 짠했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회적 약자에게 측은지심이나 동정심을 느끼는 건 자연스럽다. 겉으로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목표로 내건 ‘희망버스’의 동조자가 적지 않은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비정규직이 870만 명이나 되고 직장인이라면 정리해고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게 현실이니 동병상련을 느낄 만하지 않은가.

그러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동정과 법을 무시하면서 불법행동을 지원하는 건 구별돼야 한다. 김 씨는 “악법도 법이니까 지켜야 한다는 쪽보다는, 어느 한쪽만 일방적으로 피해를 보는 나쁜 법은 자꾸 문제를 제기해서 깨 버리자는 논리에 더 수긍이 간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민주화된 세상에서 법을 어기면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이라면 사회적 약자가 법을 지키지 않거나, 약자를 돕기 위해 법을 어기는 걸 ‘선의의 불법’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설사 ‘선의의 불법’이 있다고 해도 그게 합법일 순 없다. 국민이 불법에 무감각해지면 사회의 갈등과 혼란은 악순환할 수밖에 없다.

법치 개념이 약한 국민을 이용해 정치적 잇속을 챙기려는 세력은 얼마나 많은가. 뒷감당할 능력도, 책임질 마음도 없으면서 굿판이 벌어지는 곳마다 몰려가는 자들이야말로 경계해야 할 위선자들이다. 광우병 사태나 용산 참사 때 맹활약한 주역들이 희망버스 행사에 열심이다. 순진한 여중생들을 앞세워 정권에 대한 적개심으로 세상을 뒤집으려 한 세력과 한진중공업 사태를 주도하는 세력은 크게 다르지 않다.

희망버스를 탄 사람들 가운데 누구도 공개적으로 김 씨에게 이제 그만 내려오라고 말하지 않는 건 참으로 잔인한 짓이다. 8개월 동안 추위와 더위, 비바람을 견디며 크레인 위에서 사는 건 감옥생활보다 나을 것도 없을 게다. 김 씨는 이제 스스로 크레인을 내려올 수도 없다. 희망버스가 저렇게 응원하는데 어떻게 그러겠나.

김 씨를 동정하고 응원하는 사람 누구도 그 대신 구속될 수도, 감옥생활을 해줄 수도 없다. 김 씨가 희생양이 되길 바라지 않는다면 ‘5차 희망버스’는 그를 크레인에서 내려오게 해야 한다. 야당도 ‘우리가 국회에서 노력할 테니 이제 내려오라’고 김 씨를 설득할 때다. 1998년 노사정 합의로 정리해고제를 도입한 민주당이 김 씨의 불법 크레인 시위를 이용해 정치적 이득이나 노린다면 위선의 정치일 뿐이다.

권순택 논설위원 maypo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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