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를 이끈 潮流]매스 미디어/거대한 '여론의 광장'

  • 입력 1999년 12월 23일 18시 52분


《21세기 뉴미디어시대의 핵심적 이슈는 매체의 다양성이 과연 의견의 다양성을 보장할 수 있느냐는데 있다. 시장경제적 민주사회에선 각각 다른 계층이나 이익집단이 공론장에서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해, 경쟁을 통해 합리적인 여론이 형성돼야 한다. 다양한 정보의 제시와 의견의 자유로운 교환을 주도하는 매체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지난 50년간 언론학 연구가 진행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20세기 전반부에 인류는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세계대전을 두 차례나 치렀다. 폭력이 난무하는 전쟁터에서도 숭고한 사랑이 싹틀 수 있듯이, 과학과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는 양차 세계대전을 통해 눈부시게 발전했다. 금세기 최대의 실용 사회과학이라 할 수 있는 언론학(Journalism & Mass Communication)은 1,2차대전을 통해 학문적 근거를 마련했다.》

초기의 사회과학자들은 전쟁을 통해 선전의 효과가 매우 크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인간의 태도나 행동을 한 순간에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나치의 선전술에 대응하기 위한 심리전의 일환으로 커뮤니케이션 연구가 시작됐다. 2차대전이 끝난 후 매스컴 현상을 연구하는 언론학은 새로운 사회과학으로 대학에 자리를 잡게 된다. 역사가 50년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신생학문이라 할 수 있다.

매스컴 연구에 대한 사정은 동서양간에 비슷해, 이 분야의 학과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신설되고 있다. 국내에서 1975년 이전까지만 해도 신문방송학과가 있었던 대학은 열 곳 미만이었다. 현재는 전국적으로 70개교 이상의 대학이 신문과 방송, 잡지 중심의 올드 미디어와 케이블TV, 위성방송, 인터넷, 웹사이트, 무선전화와 같은 뉴 미디어를 연구하고 있다. 실용학문으로 출발해서인지 전세계 커뮤니케이션 학자의 과반수가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언론학이 새로운 사회과학으로 자리를 잡기까지에는 누구보다도 윌버 슈람(1907∼1987)의 기여가 컸다. 슈람이야말로 언론학이 사회과학으로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제일의 공로자로 여겨진다.

매스컴 현상에 대한 경험적 연구로 언론학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인 에버렛 로저스와 스티븐 채피에 따르면, 슈람이 아이오아대 일리노이대 스탠퍼드대에 신문방송학과를 설립한 데에는 윌라드 블레이어(1873∼1935)라는 선구자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한다.

언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블레이어는 1905년에 위스컨신대에서 ‘뉴스작성법’(News Writing)이란 역사상 최초의 언론학 과목을 개설했으며, 1906년 언론학과정의 주임교수가 된다. 위스컨신대의 언론학과정은 1912년에 언론학과로 바뀌며, 1927년에 언론대학(School of Journalism)으로 승격한다. 블레이어는 사회과학적 방법을 동원한 체계적인 연구를 통해 언론학을 의학이나 법학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려고 노력했다. 언론학 교육 시스템의 개척자로서 블레이어는 보다 실무형 교육을 주도한 미주리대 언론대 창시자인 월터 윌리암스와 비교된다. 언론학 교육에서 블레이어의 모델이 없었다면, 슈람이 아이오아대에서 언론학에 관심을 가질 기회가 없었을 것이며 블레이어 제자들과 함께 일리노이대나 스탠퍼드대에서 신문방송학과를 육성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초기 매스컴 연구는 신문과 라디오가 전하는 메시지가 수용자의 태도와 행위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사회과학적으로 규명하려 했다. 라자스펠드와 그의 동료가 1948년 에리 카운티에서 본격적인 매스컴 효과연구를 실시했다. 예상과는 달리, 미디어를 통한 정치선전메시지가 유권자에게 직접적이며 즉각적인 효과를 나타내지 않았다. 오히려 대인간 채널이 매스컴 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 사실의 발견으로 미디어 메시지가 여론지도자에 영향을 미치며, 여론지도자가 다시 그들의 추종자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2단계 전파(two―step flow) 가설이 제시됐다.

매스컴의 효과가 제한적이라는 당시 학계의 발견에 따라, 첨단 사회과학으로 도약하려던 언론학은 60년대 들어 학문적으로 위기에 처한다. 매스컴의 효과가 없다면 더 이상 언론을 연구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50년대 초반부터 미국 가정에 급격히 확산되기 시작했던 텔레비전은 라디오와 잡지를 제치고 60년대 들어 중심적 매체로 부상했다. 미국 유권자의 절반 이상이 1960년에 케네디와 닉슨의 텔레비전 토론을 시청했으며, 결과적으로 젊고 매력적인 케네디가 새 대통령에 당선된다. 매스컴 현상에 관심을 갖고 있던 사회과학자들은 다시 텔레비전 메시지의 효과연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MIT대의 정치학자 다니엘 러너가 ‘근대화를 위한 커뮤니케이션 이론’에서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이 대인컴에서 매스컴으로 바뀌면, 권위주의적인 정치체제가 민주적인 정치체재로 바뀐다는 가설을 제시한다. 국민은 자유스러운 정치적 참여를 통해 만족감을 느끼게 되며, 개개인의 정치적 만족을 통해 근대화를 이룰 수 있다는 논지이다. 미디어 시스템과 민주주의 관계를 이론적 체계를 갖추어 설명한 최초의 연구라 할 수 있다.

러너에 따르면 국가가 아주 부유하거나 아니면 막강한 경찰력을 갖고 있을 때 사회의 갈등을 쉽게 조정할 수 있다. 하지만 경제적 재원은 늘 한정적이며, 경찰력으로 국민을 통제하는 방식에 동의하기도 어렵다. 따라서 민주적 사회통제의 수단으로 언론연구가 활성화됐다.

언론학자들은 1970년대 들어서면서 미디어 메시지가 개인의 인지구조와 사회시스템 그리고 문화현상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본격적으로 살펴보게 된다. 언론학의 르네상스에 해당한다. 미디어가 보도하는 이슈를 국가가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이슈로 국민이 인식하게 된다는 의제설정가설이 1972년에 제시된다. 워터게이트사건 보도로 1974년 인류 역사상 최초로 대통령이 현직에서 사임하게 된다. 이 때를 전후해, 미디어 이용에 따라 정보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일어난다는 지식격차 가설이 제시된다. 그 후 텔레비전이 전하는 메시지 성격에 따라 국민의 사회현실이 다르게 구성된다는 문화배양 가설과 미디어의 효과가 나보다는 남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제3자 효과, 공론장에서 의견 발표에 관련된 침묵의 나선 현상에 대한 검증작업이 80년대와 90년대를 거쳐 보다 체계적으로 진행됐다.

또한 세계인구의 절반이상이 월드컵이나 수퍼보울 중계와 같은 특정 프로그램을 함께 볼 수 있는 상황에서 올드 미디어와 뉴 미디어가 지구촌 형성이나 세계화에 어떤 순기능과 역기능을 수행하고 있는지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언론학은 이와 같이 사회과학적 방법론을 동원해 실용적 학문의 메카로 자리잡아 나가고 있다. 로버트 머튼이 말한 중간범위(Middle Range)의 이론을 넘어서, 새 천년의 언론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치열하게 이론적 작업을 하고 있다. 라자스펠드, 라스웰, 호브랜드와 함께 초기에 매스컴 현상에 대한 연구 틀을 제시한 커트 루윈의 명언을 가슴에 간직하면서.

“실용적이 아니라면 더 이상 이론이 아니다.”

심재철<고려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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