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종식]인구대비 소송건수 日의 4배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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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2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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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부터 써온 말 가운데 ‘척지다’란 말이 있다. 척(隻)이란 지금으로 말하면 민사소송을 당한 ‘피고’를 뜻한다. 요즘 사람들이 ‘척지다’를 ‘원수가 되다’란 뜻으로 쓰는 걸 보면 예나 지금이나 소송은 양쪽 당사자들의 인간관계를 파탄으로 몰고 간다.

대한민국은 세계 제1의 ‘소송공화국’이다. 지난해 한국 법원이 처리한 민사 사건은 128만4430건. 한국과 법률문화가 비슷한 일본은 같은 기간에 77만3000건을 처리했다. 일본의 인구가 한국보다 약 2.6배 많은 것을 감안하면 인구 대비 소송 건수는 한국이 일본의 4배가 넘는다.

한국에서 소송이 잦은 이유를 국민성에서 찾는 사람이 많다. 일본은 예로부터 양명학(陽明學)을 받아들여 실리를 중시하고 사전 조율과 막후 협상에 익숙한 반면 한국은 주자학(朱子學)을 수용해 체면과 명예를 숭상하면서 타협을 변절과 다름없이 여기는 풍토가 생겼다는 것이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한국 사람들이 조정과 타협에 인색하다는 것은 통계가 증명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지난해 전체 민사 분쟁의 35%가량이 법원 판결이 아닌 조정·화해로 처리됐지만, 한국은 전체 민사 사건의 6.5%만이 조정·화해로 종결됐다. 이 또한 대부분 재판부의 강제에 가까운 권유로 이뤄진 것으로, 처음부터 조정을 신청한 건수는 0.7%(9216건)에 불과하다.

소송이 넘쳐나는 또 다른 이유는 소송비용이 싸다는 점도 한몫하고 있다. 뉴질랜드에서 하루 소송을 진행하는 데 법원에 내야 하는 돈은 약 2600달러(약 300만 원). 이처럼 영미법 계통 국가는 소송비용이 너무 비싸 전체 분쟁의 10%가량만 법원의 재판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소송을 하든, 조정·화해 절차를 밟든 비용 차가 크지 않아 ‘소송을 걸고 보자’는 심리가 강하다. 여기에 법관과 변호사들이 조정·화해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도 소송 남발의 원인이 되고 있다.

법원은 분쟁의 조정률을 높이기 위해 올해 4월 서울과 부산에 조정만 전담하는 법원조정센터를 세웠다. 법조 경력 15년 이상의 법조인들을 배치했고, 소송에 필요한 인지 값도 정식 소송의 5분의 1 수준인 8만 원으로 낮췄다. 평균 조정기간도 3개월 안팎으로 훨씬 짧다.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홍보가 제대로 안된 탓인지 서울법원조정센터에는 매달 120건 정도만 접수된다.

국민이 ‘척’을 많이 질수록 사법서비스의 질은 나빠지고 그만큼 억울한 사람도 늘 수밖에 없다. 척을 지기 전에 조정과 화해의 묘안을 내도록 돕는 법원의 적극적인 홍보 활동이 아쉽다.

이종식 사회부 bel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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