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오명철]‘천사 같은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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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0월 7일 02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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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물리학자다. 국내 명문대에서 공부한 뒤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마디로 수재였다. 미국 이탈리아 프랑스 등에서 연구원을 지낼 정도로 국제적으로도 실력을 인정받았다.
1974년 그가 이탈리아의 국제이론물리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할 당시 ‘운명의 여신’이 그에게 나타났다. 서울의 명문 사립대에서 방문연구원으로 온 수학 전공의 여교수였다. 그는 일곱 살 연상의 그 여교수와 사랑에 빠졌다. 여교수는 1970년 조각가인 남편을 여읜 채 4남매를 키우며 살고 있었지만 그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7세 연상-4남매 딸린 여인과…
1976년 여교수가 몸담고 있는 대학에서 그를 초빙했다. 그에게는 그 대학 전임 자리가 예약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가 같은 대학의 홀로된 연상의 여교수와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고, 그들의 사랑은 보수적인 대학사회에서 용납을 받지 못했다. 그는 결국 다른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부모 형제는 물론이고 선배와 동료 교수들도 말렸다. 특히 여자 집안에서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너한테는 너무 과분한 상대다. 총각이 사랑에 눈이 멀어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 나중에 정신이 돌아오면 너만 우습게 되고 아이들도 상처를 받는다”는 것이었다. 남자 집안은 “결혼은 처녀 총각지간에 하는 것”이라는 입장이었다. 오직 남자의 친구 한 사람만이 “결혼에 사랑 이외의 조건은 없다”며 그를 지지했다.
그는 세상 사람의 시선보다 사랑을 선택했다. 결혼식은 여자 집에서 열렸다. 여자 쪽은 손님이 많았으나 남자 쪽은 거의 없었다. 결혼생활은 때로 물리학보다 더 복잡하고 어려웠고, 수학처럼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전남편이 남긴 4남매를 자신의 친자식처럼 헌신적으로 기르고 챙겼다. 자녀들을 모두 학교에 데려다 준 뒤 아내를 ‘모셔다 드리고’ 나서야 대학으로 향했다.
자식들도 새아버지를 친아버지처럼 따랐다. 사소한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자녀들은 다들 번듯하게 자라 가정을 이뤘다. 그는 친자식 보내듯 2남 2녀의 혼사를 치렀다. 사위 중에는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유명 인사도 있다.
아내는 40세에 요절한 전남편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가급적 삼갔다. 그것이 현재의 남편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집 안에 전시실을 만들어 아내의 전남편 작품들을 전시했고,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작품을 설명해주곤 했다. 마치 자기 친구나 아버지의 작품을 자랑하듯이. 또 화랑에서 유작전을 열기도 했다. 그의 절친한 친구 한 사람은 “보통 사람은 정말 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회고했다.
“난 이집에 양아버지로 입양됐다”
올봄 어느 화창한 날. 서울의 한 호텔에서 자녀들이 마련한 그의 칠순 축하연이 열렸다. 아들딸들과 손자손녀들이 각기 재주를 선보이고 합창도 하는 공연 같은 잔치였다. 한 참석자는 “아들딸 사위 손자만 해도 1개 소대는 되는 것 같더라”며 부러워했다. 맏아들이 하객들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고, 둘째 사위가 사회를 맡았다. 그는 답사에서 “내가 이 집에 양아버지로 입양됐는데 아이들이 다들 잘 자라줘 너무나 고맙다”고 인사해 좌중에 폭소를 자아냈다.
30여 년 전 아이 넷 딸린 연상의 여교수와 일곱 살 아래 후배교수의 결합은 정말 신문에 날 법한 ‘사건’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어쩔 것인가. 그들은 서로 사랑했고, 합심해서 아이들을 길렀으며, 서로에게 최선을 다했다.
대학에서 정년퇴임한 이 부부는 요즘 안락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 매달 나오는 연금으로 손자손녀들 맛있는 것 사주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한다. 사랑에 조건과 제한 같은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 ‘천사 같은 남편’. 소설이 아니다. 실화다.
오명철 전문기자 osc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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