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잡史]<56>늙은 형수를 봉양한 약초꾼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7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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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서울 사람은 걸핏하면 탕약을 지어 먹지만, 먼 산골짜기에 사는 백성은 의원과 약방이 있는 줄도 몰라서 병에 걸리면 누워서 앓기만 하다가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한다.” ―이익 ‘성호사설’

1123년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사람 서긍에 따르면 고려 사람들은 병에 걸려도 약을 먹을 줄 모르고 무당만 찾았다고 한다. 무식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의료 환경이 열악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한양에는 그나마 혜민서, 활인서 등 백성의 치료를 담당하는 기관이 있었지만, 지방에는 인턴에 해당하는 의생(醫生)과 진상 약재의 품질을 점검하는 심약(審藥)을 파견하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조정에서 ‘향약집성방’을 비롯한 의서를 편찬, 보급한 것도 열악한 의료 환경을 개선하려는 노력이었다. 서울 양반들도 안면이 있는 관원에게 약재를 조금씩 얻어 쓰는 형편이었으니, 지방 백성은 약 한 첩 지어 먹기 어려웠다. 뜻있는 지방관은 지방 유지와 협력해 자구책을 마련했다. 1367년 안동부사 홍백정이 설립한 약원(藥院)은 약재 창고에 목욕탕과 숙박시설까지 갖췄다. 하지만 이런 의료기관은 설립도 어렵고 유지는 더욱 어려웠다.

의료 환경이 열악한 탓에 백성들은 각자도생을 모색했다. 간단한 의술과 약재에 대한 지식은 상식에 속했다. 직접 약초를 캐어 약을 조제하는 행위가 효자의 자질로 거론될 정도였다. 웬만한 집에서는 약포(藥圃)라는 약초밭을 일궈 상비약을 마련했다. 재배한 약초를 빌리거나 빌려주기도 했다. 1683년 안동의 선비 이유장은 천연두에 걸리자 친구 13명에게 15종의 약재를 빌렸다. 잊지 않고 갚으려고 품목과 수량을 꼼꼼히 적어뒀다.

이렇게 알음알음 약재를 주고받던 단계를 지나 약계(藥契)라고 하는 협동조합이 탄생했다. 여러 사람이 돈을 모아 약재를 구입해 뒀다가 필요할 때마다 값을 치르고 갖다 쓰는 식이다. 지금도 남아 있는 경북 상주의 존애원(存愛院) 역시 약계의 일종이다. 1599년 설립된 존애원은 우리나라 최초 사설 의료기관이다. 노는 사람들을 모아 약초를 캐게 하고, 중국산 약재도 구입해 갖췄다. 약계는 약국으로 발전했다.

약국은 본디 왕실의 의료행위를 담당하는 내의원(內醫院)의 별칭이다. 약국 주인은 봉사(奉事)라고 불렀다. 원래는 내의원의 관직명인데 약국 주인의 호칭으로 쓰였다. 조선 후기에는 민간 약국이 번창했다. 서울 구리개(현재 을지로)에는 약국이 밀집해 약국거리를 형성했다. ‘신농유업(神農遺業)’ ‘만병회춘(萬病回春)’ 등의 간판을 걸고 영업했다.

약재 유통 환경은 이처럼 발전을 거듭했지만 약재를 공급하는 사람은 여전히 호미를 들고 광주리를 짊어진 약초꾼이었다. 이들은 범을 만날 위험을 무릅쓰고 약초를 찾아 깊은 산속을 헤맸다. 19세기 서울의 남씨 노인은 약초를 캐고 버섯을 팔아 늙은 형수를 봉양했다. 형수는 일찍 죽은 부모 대신 그를 길러줬다. 형수가 세상을 떠나자 남씨는 삼년상에 준하여 상을 치르고, 제사 때마다 형수가 생전에 즐기던 생선 알을 올렸다. ‘추재기이’에 나오는 이야기다. 거대한 의료체계를 지탱한 것은 남씨와 같은 이름 없는 약초꾼들이었다.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책임연구원
#고려#성호사설#약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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