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있게한 그 사람]이찬 세계태극권연맹 부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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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6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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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권의 오묘함 일깨워주신 사부님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동양인의 음식과 일상생활은 서양인과 다르므로 반드시 동양인에게 적합한 운동이 있어야 하고 심신을 건강하게 하려면 당연히 태극권을 수련해야 한다.”

나의 사부 음영노인(陰影老人) 국홍빈(鞠鴻賓) 선생님께서 늘 하시던 말씀이다. 무술 입문 48년, 무예 보급 32년의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변화를 주었던 태극권과의 만남, 그리고 사부님과의 만남은 지금도 내 영혼을 울리며 나를 채찍질하고 있다. 모든 한국인이 강인하게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날을 만들 때까지 정진하라고.

어린 시절부터 소림권과 당랑권을 익혀 강한 무술의 재미에 빠져 살던 내가 우연히 태극권이라는 부드럽고 우아한 운동을 접하게 된 것은 1978년 봄. 양징보 선생의 저서 ‘태극권용법도해’를 읽고 그 오묘한 깊이에 감탄해 태극권을 익혀야겠다는 소망을 품게 됐다. 중국의 정통무술이면서 보통 사람들도 건강운동으로 익힐 수 있는 태극권. 그러나 당시엔 한국에 알려지지 않아 두루 무술을 익혀온 나도 실제로 태극권을 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러다 어렵게 만난 강용일 최영근 진정의 선생 같은 분들께 이끌려 태극권에 입문할 수 있었다.

이미 많은 무술을 수련해 왔고 마음속 열망이 깊었던 만큼 남들보다 빠른 성취를 보이고 있을 때 대만에서 태극권의 최고수인 국홍빈 선생님을 만날 기회를 얻었다. 소개장 한 장 달랑 들고 찾아뵌 선생님. 그분은 내게 진정 거대한 산과 같은 분이었다. 내가 빠른 성취의 자만에 빠져 있던 때 국 선생님과의 만남은 놀라운 개안의 순간이었다.

태극권에는 손으로 상대를 밀어 제압하는 추수(推手)라는 수련법이 있다. 온몸의 힘을 빼고 몸과 기로 상대를 밀어 제압해야 한다. 힘으로 힘을 이기거나 빠름으로 빠름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고요함과 유연함으로 강함을 이기는 태극권의 오묘함이 담겨 있는 수련이다. 만만한 마음으로 국 선생님과 마주섰지만 나는 그분을 제대로 밀 수도 없었다. 선생님을 밀라치면 마치 허공에 매달린 수건을 미는 듯했고 선생님이 밀어오면 내가 포승줄에 묶이기라도 한 듯 꼼짝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때 눈을 떴다. 새로운 세상을 경험한 것이다. 그 후 태극권의 심오함은 내 인생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무술 좀 한다며 망나니처럼 살던 이전의 삶을 정리하고 나는 한국에 태극권을 보급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전혀 다른 생활이 시작됐다. 묵묵히 나를 격려하며 생활고를 견뎌준 아내의 모습, 머리를 밀고 하루에 권가(拳架) 수련을 10번 이상씩 10년간 할 때의 내 모습, 태극권 선생은 당연히 슈퍼맨쯤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의식해 아파도 아픈 티를 내지 못했던 시간들, 동문 사제인 무술스타 이연걸과 합동 시연회를 하며 군중의 갈채를 받았던 일, 아침에 눈을 떠 잠자리에 들기까지 꼼짝 않고 책 쓰기에만 몰두했던 때, 잠자면서도 무술을 생각하던 시절 꿈속에 신선이 나타나 초식을 전수해 준 일, 국제대회에서 당당히 중국인들을 물리치고 1위를 한 일들이 떠오른다. 모두 국 선생님과의 만남 이후 일어난 일이었다.

국 선생님은 대인의 풍모를 지닌 분이다. 무술을 하는 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기예를 후학들에게 강권하는 편인데 내가 이소룡의 무예와 마이클 잭슨의 춤에서 힌트를 얻어 생활 속 편리함을 태극권에 접목한 ‘테라피 타이치’를 창안해 선생님께 선보였을 때 기뻐하시며 격려해 주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1917년 상하이에서 출생해 지금도 대만에서 자신을 수련하며 후예를 기르시는 국 선생님. 그분의 가르침을 한국에서 전수하며 내 마음속에 품은 신념을 나는 최근 펴낸 책 ‘30분 태극권, 테라피 타이치’에 이렇게 적었다. “저는 믿습니다. 테라피 타이치는 약자는 강하게 하고, 병자는 일어나게 하며, 쇠약한 자는 왕성하게 하고, 나약한 자는 뜻을 세우게 하리라는 것을….”

나의 스승께서 공산화된 중국 본토를 떠나 대만에 정착해 무예의 깊은 깨달음을 펼치신 숭고한 뜻이 여기 담겼으며, 태극권 불모지였던 한국에 내가 인생을 바쳐 보급에 나선 목표도 여기에 있다.

이찬 세계태극권연맹 부주석
#이찬#태극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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