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윤석민] ‘비겁한 평화’를 평화라 부를 수 있나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11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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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은 과연 어디까지 분노를 억누를 수 있는가. 천안함 사태가 발생한 지 8개월이 채 안 됐다. 그나마 최소한 겉으로는 오리발을 내밀던 집단이었다. 불과 얼마 전 이산가족 상봉이며 금강산 관광 재개를 위한 남북 접촉이 이루어진 참이었다. 실로 어렵게 상처를 치유해가던 중이었다. 그런데 북은 이번엔 아예 백주 대낮에 수많은 민간인들이 거주하는 연평도 복판에 예고 없이 포탄을 퍼부어 30여 명의 인명을 살상했다.

몇 가지 중요한 사실관계를 따져 보자. 첫째, 연평도는 어떤 곳인가. 연평도, 소연평도, 대청도, 소청도 및 백령도를 통칭하는 서해 5개 도서, 특히 백령도는 인천에서 150km, 연평도는 70km 이상 떨어져 있지만 황해도 해안과는 십수 km 정도로 가깝게 붙어 있다. 우리로선 수도권 북 해상 일차 방어선, 북측으로서는 목에 가시 같은 요충지다. 그러기에 북은 끊임없는 도발을 통해 서해5도의 분쟁지역화를 기도했다.

둘째, 무작위의 위협성 타격인가, 정밀 타격인가. 현재까지의 정황으로는 정밀 타격이 분명해 보인다. 그 주 타격점은 연평도 내 군사시설물 및 그 장병들이었다.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된 두 민간인은 해병대 막사 부근에서 공사를 하던 중 비명횡사했다. 포격당한 건물 중 하나인 ‘연평마트’는 10여 년 전까지 보안대 건물이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과거 정보를 바탕으로 북한이 이를 포격했을 개연성이 크다.

셋째, 왜 쏘았는가. 우라늄 농축 시설 공개라는 카드까지 꺼내 보였음에도 한미 양국이 강경 모드를 바꿀 기미를 보이지 않자 북이 극단적 수단을 동원했으리라는 게 전문가들의 판단이다. 김정은 후계 체제 구축 과정에서 내부를 단속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북은 주민과 국제사회를 상대로 남측이 먼저 포격을 가해 “본때를 보여줬다”는 식의 빤한 선전전을 전개 중이다.

북이 이 공격을 오랫동안 준비했음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포격 도발을 한 북의 군부대는 4군단에 속해 있다. 4군단장은 북한 군부 내의 대표적인 대남 강경파이자 김정은의 최측근 군부인사인 김격식 대장이다. 김정일 김정은 부자는 해안포 포격 직전 해당 부대 인근의 황해남도 황계지역을 비밀리에 방문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북이 최근 서해 해안포의 파괴력을 크게 늘린 것도 금번 도발사태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동굴 진지엔 1분에 8발이나 쏠 수 있는 76.2mm 평사포와 122mm 대구경포가 대거 포진됐다. 주력 해안포로 꼽히는 130mm 대구경포의 위력은 20cm 두께의 철판을 관통해 전투함을 한 발에 침몰시킬 정도다. 여기에 사거리 54km의 170mm 자주포까지 가세하면 서해 5도 전 지역이 사정권에 들어온다.

그날의 상황을 그려 보자. 명령이 떨어지자 포병대를 구성하는 눈(관측), 뇌(사격지휘), 손과 발(전포반)이 한 몸이 되어 오래전에 계획해둔 작전을 착착 전개했을 것이다. 동굴 속에 엄폐된 수백 문의 포 하나하나가 이미 타격목표를 향해 맞추어져 있었으리라. 공격 개시를 목전에 둔 초긴장 상태 속에 포신의 편각(위아래)과 사각(좌우)은 다시금 풍향 풍속 온도 기압 등을 고려해 밀(원의 둘레를 6400눈금으로 등분한 단위. 1밀 변동 시 1km 사거리에서 탄착점이 1m씩 이동) 단위로 미세조정됐을 것이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북은 연평도와 가까운 무도에서 76mm 포를 먼저 쏴 그 탄착지점으로 사거리를 맞춘 후 개머리 기지의 해안포로 170여 발의 포탄을 집중 사격했다. 그중 90여 발은 바다, 80여 발은 연평도에 떨어졌다.

모든 정황을 고려할 때 이번 연평도 포격은 북의 최고 통수권자의 직접적인 지시하에 명확한 목표를 갖고 수행된, 전략적 요충지에 대한 북 포병대의 정밀타격 행위였다. 우발적, 위협적 도발이 아니라 오래 준비한 계획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수행된 군사작전이었다. 우리가 아무리 분노한들, 60년 전 이 땅을 폐허로 만들었던 전쟁의 참화가 재발하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든 막아내려 함을 알기에, 모든 건물과 가옥이 잿더미가 되고 시체가 산더미로 쌓이고 자녀를 잃은 부모들이 피눈물을 쏟고 부모와 형제를 잃은 아이들이 처참하게 떠도는 사태를 막아내려 함을 알기에 벌인 짓이었다.

그러고는 태연자약하게 우리 반응을 살피고 있다. 너무도 가증스럽다. 북의 도발에 똑같은 도발로 맞설 수 없음을 잘 알지만, 이성의 힘으로 이 사태를 극복해야 함을 너무도 잘 알지만, 참담한 분노와 모멸감에 온몸이 떨리는 걸 어쩔 수가 없다. 과연 이렇게까지 당하며 지켜야 하는 비겁한 평화를 평화라 부를 수 있는 것인가. 연평도 다음은 어디인가. 서울인가, 부산인가.

윤석민 객원논설위원·서울대 교수·언론정보학 younsm@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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