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허문명]박지향과 윤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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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3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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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때 4·19혁명을, 대학 때 유신을 겪었던 서울대 서양사학과 박지향 교수는 한때 “박정희가 암살당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한국의 현대사처럼 불의에 찬 역사가 없다는 생각에 민주주의 역사가 긴 영국사를 공부해 한국을 비판하겠다며 유학길에 오른다. 그러나 선진 해외 학계는 이미 한국의 고도성장에 주목하고 있었고 박정희 리더십에 호의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한때 마르크시즘의 매력에 빠지기도 했던 그는 계급, 민족, 경제적 조건 같은 한 가지 잣대로 역사를 해석하는 것이 위험한 일이라는 결론도 얻게 된다. 삶이 복잡하듯, 역사도 그렇다는 것. 역사가의 일이란 지금 기준이 아니라 당시 기준으로 왜 그들이 그렇게 행동했는지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그가 친일 지식인 ‘윤치호의 삶’에 주목한 이유다.

조선 말기에 태어나 일제병합, 식민지, 광복까지 겪은 윤치호(1865∼1945)는 19세기 후반 일본 중국 미국에 유학한 한국 최초의 ‘근대적’ 지식인이자 독립협회를 이끌던 개화 자강 운동의 지도자요, 식민지 시기 기독교계 최고 원로였다.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해 18세 때부터 죽기 2년 전인 78세 때까지 60년간 쓴 영어 일기(5000여 쪽)는 식민지 시민으로 살아가는 억하심정을 독백으로 풀어 낸 ‘작은 저항’이었다.

그는 ‘조선 독립이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1930년대 나치즘과 공산주의가 창궐하는 세상에서 그나마 일본의 보호 아래 있는 것이 조선민족이 생존하는 최선이라고 여겼다. “물지 못하면 짓지도 마라”가 좌우명이었던 그는 “물지도 못하면서 방바닥을 두드리며 울부짖는 조선 사람들”이 가여웠다.

그의 불행은 ‘균형감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사물의 양면을 함께 보았던 까닭에 병합의 책임에 조선의 잘못도 있다고 생각했다. 일제와 타협한 대가로 호의호식하지도 않았다. 수도자처럼 살았고 사재를 털어 교육사업에 헌신했다. 지인들이 외국 나가서 편하게 살라고 권할 때마다 “나의 전쟁터는 조선”이라고 말했다.

그는 리더라기보다 고뇌하는 지식인이었다. 낙향해 자연에 파묻히고 싶다고 기도했지만 변변한 지도자가 없었던 조선 사회는 그를 공직(公職)으로 끌어냈고 그는 자신에게 부과된 시대적 의무에 힘겨워했다.

“우리는 조상들에게 왜 그렇게 살았느냐고 비난하지만 그것은 후손들의 오만함이다. 조상들도 ‘불확실한 상황’에서 이익과 손해를 복잡하게 계산하며 대단히 힘든 결정을 내렸던, 지금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었다. 조상들의 삶을 측은한 눈으로 보면 한(恨)과 분노로 일그러진 현대사가 굴레가 아니라 교훈으로 다가온다.”(박 교수)

상하이 임시정부나 무장투쟁도 소중한 역사이지만 모욕과 수치를 견디며 후대(後代)를 생각했던 ‘윤치호류(類)’의 삶도 이제 감싸 안을 때가 됐다. ‘기록된 역사’는 승자나 패자 같은 극적인 삶에 관대하지만 ‘실제 역사’를 만들어간 사람들은 영웅보다는 보통사람, 대의명분보다는 백성이나 가족을 먼저 생각하며 살았던 삶 아닌가. 박 교수의 새 책 ‘윤치호의 협력일기’(이숲)는 그런 점에서 공동체를 위해 자존(自尊)을 버렸던 숱한 ‘윤치호’들, 현재 우리 삶을 단단하게 버티고 있는 ‘또 다른 윤치호’들에게 보내는 따뜻한 송가(頌歌)다.

허문명 국제부 차장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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