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선미]마광수 교수의 문학수업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9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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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미 문화부 차장
김선미 문화부 차장
대학 시절 그의 문예사조론 교양과목을 수강했다. 당시 ‘연세대 스타 교수’였던 마광수 국문과 교수의 수업이 얼마나 대단한가 보자는 당돌한 심산이었다. 야한 여자가 좋다고? 사라는 즐겁다고?

그런데 놀랐다. 수백 명이 가득 찬 강의실에서 그는 얇은 버지니아 슬림 담배를 피우며 강의를 했다. 거의 항상 앞자리에 앉았던 나는 담배를 들고 있던 그의 가늘고 긴 손가락을 기억한다. 그 손가락이 담배 연기의 선(線)마저 미학적으로 그려내는 것 같았다. 마 교수는 “수업은 교수와 학생이 함께 만드는 것”이라면서 “원하는 학생은 강의실 뒤편에 앉아 담배를 피우라”고 했다. 학생들은 “와우” 하며 환호했다. 그러나 강의하는 스승을 강단에 두고 정작 뒤에서 흡연하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

이 수업의 백미는 ‘에로틱 판타지’였다. 그는 학기말에 시험을 치르지 않고 대신 과제를 냈다. “나를 흥분시키는 에로틱 판타지 소설을 써서 내라”는 것이었다. 참으로 황당했다. 그러나 학점을 잘 받기 위해서는 최대한 ‘야하게’ 써야 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도전의식도 스멀스멀 생겨났다.

경험이 일천하기 때문에 그가 쓴 책들을 탐독한 뒤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일단 교수가 사랑해 마지않는 ‘손톱을 길게 길러 정성껏 가꾸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설정했다. 왠지 동물이 소설에 나오면 야하지 않나 싶어 고양이도 등장시켰다. 사랑의 쾌감엔 시각만큼 후각도 중요할 것 같아 ‘샤넬 넘버5’ 향수를 복선의 장치로 사용했다. 학점에 후했던 그로부터 ‘A’를 받았다.

그런데 학점을 떠나 정작 내가 놀란 건 마 교수의 강의 내용이었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 등 세계 문예사조가 그의 한마디 한마디로 쏙쏙 정리되는 게 아닌가. 그때 생각했다. ‘아, 야한 여자가 마광수를 잡아먹는구나. 즐거운 사라가 교수로서의 면모를 가리는구나.’

20여 년이 흘러 동네 빵집 앞에서 그와 마주쳤다. “선생님, 예전에 수업 참 좋았습니다”라고 인사를 건네자 활짝 웃으면서 반가워했다. 마 교수가 사는 아파트는 내가 다니는 목욕탕 근처에 있어 이후로도 이따금 보게 됐는데, 갈수록 가냘프고 왜소해 보였다.

5일 그가 세상과 작별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집에 돌아와 그가 1995년에 펴냈던 ‘운명’(사회평론)이란 책을 다시 꺼내봤다. 실은 ‘즐거운 사라’를 찾았으나 행여 아이들 눈에 띌까 봐 서가 구석에 처박아 둔 탓에 찾기가 어려웠다.

‘운명’의 표지엔 동양고전 주역에 나오는 이런 글귀가 있다. ‘태양빛이 너무 뜨거워 우산을 쓰니까 비가 온다.’ 태양이 뜨겁게 내리쪼이면 남 눈치 볼 것 없이 우선 우산이라도 써야 하고, 그러다 보면 한 줄기 시원한 비가 우연히 쏟아져 내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관심을 가져 책장이 닳도록 주역을 읽었다는 마 교수는 어려움에 빠져 있을 때는 이열치열(以熱治熱) 식의 방법이 크게 효과를 본다고 이 책에서 썼다.

그의 수업을 들었던 학생들은 ‘교수 마광수’를 저마다의 방식으로 기억한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적어도 강의실에서의 그는 탈권위적이었고, 탄탄한 이론을 알기 쉽게 잘 가르치는 교수였다. 그는 1983년 쓴 ‘윤동주 연구’란 박사 논문을 통해 국문학 역사상 처음으로 윤동주 시인의 모든 시를 분석하기도 했다.

마 교수는 운명 책 말미에 이렇게 썼다. ‘운명은 야하다. 당당하게 야한 것처럼 좋은 운명 개척법은 없다.’

무엇 때문인지 자신의 운명 개척법을 잊고 만 듯한 옛 스승의 명복을 빈다.

김선미 문화부 차장 kimsunmi@donga.com
#마광수#마광수 수업#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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