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칼럼/장일범]베를린필 ‘디지털 콘서트홀’의 신세계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12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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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적한 밤, 나는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 중 하나인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공연장에 앉았다. 사이먼 래틀이 지휘하는 공연을 듣고 감동하며 박수를 보낸다. 내가 앉아 있는 곳은 베를린 필하모닉 홀이 아니다. 우리 집 안방이다! 어떻게 된 일일까? 꿈을 꾸나? 가상현실일까? 아니다.

年30회 공연실황 온라인 중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2008년 8월 29일부터 열리는 공연을 지구촌의 누구라도 컴퓨터로 보도록 세계 최초의 오케스트라 공연 실황 중계 시스템을 마련했다. 이름은 디지털 콘서트홀(Digital Concert Hall). 연간 30회에 이르는 베를린 필의 공연 실황을 150유로를 내면 고화질(HD) 화면으로 베를린의 청중과 함께 느끼고 호흡하고 감동할 수 있다. 2008년 8월부터 열린 공연은 콘서트 아카이브에 쌓아 놓아 언제든지 원하는 시간에 보고 듣도록 했다. 여러 번 재생해서 볼 수 있으며, 실황을 놓쳐도 닷새 후면 아카이브에 올라오므로 조바심을 낼 필요가 없다.

한국에서 베를린 필 공연을 보러 가려면 최고 40만∼50만 원을 내야 하는데 베를린 필 애호가가 큰마음 먹어야 볼 수 있는 금액이다. 하지만 베를린에서 주말에 열리는 이 오케스트라의 공연은 약 80유로가 가장 비싼 가격이다. 더 많은 사람이 베를린 필의 공연을 보고 즐기도록 오케스트라는 물론이고 독일 정부와 사회에서 배려하는 것이다.

전 세계에 수많은 팬을 확보한 베를린 필은 20세기 내내 가장 앞서 새로운 기술을 녹음하며 CD나 LD의 시대를 알려왔는데 이번에도 혁명적 방법을 택했다. 클래식 음악 팬이라면 누구나 베를린을 방문해서 베를린 필을 직접 보고 싶어 한다. 공연이 시민에게 워낙 인기가 높아서 티켓이 빨리 매진되어 공연장에서 외국인이 감상하기란 쉽지 않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베를린 필은 미국 프로야구(MLB)나 미국프로미식축구리그(NFL)가 사용하는 방법을 택했다. 컴퓨터를 통해서 신용카드로 돈을 지불하고 전 경기 또는 일부 경기를 볼 수 있듯이 베를린 필도 공연당 또는 한 곡에 3, 4유로를 내면 볼 수 있는 방법도 열어두었다.

베를린 필은 중계팀이 리모트 컨트롤로 조정할 수 있는 6대의 최신 카메라장비를 통해 공연을 다양한 각도와 적재적소의 카메라 워크로 생생하게 중계한다. 예를 들어 베를린 시간으로 12월 8일 토요일 오후 8시에는 거장 네메 예르비가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러시아 출신 명피아니스트 아르카디 볼로도스가 연주하는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공연이 열리는데 우리 시간으로는 일요일 오전 3시에 이 공연을 베를린 필에 모인 청중과 똑같은 시간에 감상할 수 있다.

사양길 음반산업에 돌파구 제시

시작할 때 재미있는 사실은 로비의 모습부터 중계를 하기 시작한다는 점. 내가 공연장 로비에서 청중 사이를 돌아다니며 홀로 들어가듯이 카메라 워크를 시작한다. 공연 중계 시스템도 초창기보다 향상되어 더 좋은 화질과 음질로 베를린 필의 공연을 볼 수 있어 눈과 귀를 즐겁게 해준다. 베를린 필이 예상했듯이 디지털 콘서트홀을 가장 많이 접속해서 또는 가입해서 보는 사람은 유럽보다 일본의 클래식 팬이라고 한다.

베를린 필만 이런 시스템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The Met)도 세계 40여 개국의 다양한 영화 극장이나 콘서트홀에서 HD로 공연을 현장감 넘치는 실시간 중계로 보도록 만들었다. 아카이브를 통해서는 역시 연간 150달러의 가격으로 수많은 명작 오페라를 안방에서 볼 수 있다.

이런 시스템은 문화예술계의 강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문턱이 높다고 생각하는 일반 대중에게 클래식 공연을 인터넷 접속을 통해서 저렴하면서도 가깝게 접할 수 있게 한다. 동시에 음반 산업이 사양길을 걷는 시대에 최고의 음악 콘텐츠를 상업화시키는 일은 오케스트라로서는 새로운 돌파구가 아닐 수 없다.

베를린 필의 디지털 콘서트홀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클로즈업된 단원의 모습을 보고 친숙하게 여기며 베를린 필하모닉 홀을 찾거나 베를린 필의 순회공연 때 다시 찾아올 것이기에 매우 훌륭한 홍보 수단이기도 하다. 물론 이런 시스템은 도이체방크라는 스폰서가 커다란 기여를 했기 때문에 구축 가능한 일이었다.

정보기술(IT) 강국인 한국에서도 이런 시스템을 준비할 때가 온 것 같다. 예전에 공연기획자들은 공연을 공연장에 오는 사람만 보게 했고 현장에서만 봐야 객석이 다 차는 줄 알았다. 이제는 공연장의 콘텐츠를 많은 사람이 보면 볼수록 공연에 대한, 연주자에 대한 홍보가 되어서 더 많은 사람이 보고 싶어 한다는 점을 기억해야만 한다. 훌륭한 클래식 공연 현장에 올 수 있는 2000명이 아니라, 오고 싶어 하지만 올 수 없는 2만 명, 20만 명, 200만 명의 행복을 생각해야 할 때다.

장일범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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